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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 "아들아, 꼭 살아서 만나자"…'낙원'의 허상을 깨는 어머니의 호소

[더 스피커] 다큐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의 주인공인 탈북 여성 이소연 씨 인터뷰

'참척(慘慽)'과 다르지 않은 고통

'참척(慘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가 느끼는, 단장(斷腸)의 고통을 의미합니다. 저는 그 단어의 처절함을, 언젠가 소설가 故 박완서 씨가 스물다섯살 아들을 교통사고로 먼저 떠나보낸 뒤, '이렇게라도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았다'며 써 내려간 문장들에서 처음으로 절절이 느꼈습니다.

"내 수만수억의 기억의 가닥 중 아들을 기억하는 가닥을 찾아내어 끊어버리는 수술이 가능하다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련만…."

"'하느님이 있긴 뭐가 있냐'라고 하루에도 수없이 하느님을 죽이는 게 그 후의 나의 일과였다. 명색이 가톨릭 신자건만 어쩔 수가 없다. 그 죄로 영겁의 지옥불이 보장되어 있다고 해도 평생 그 짓에서 헤어날 수 없으리라."


다큐멘터리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에 출연한 탈북 여성 이소연 씨의 사연을 접하면서, 그녀의 고통이 박완서 씨의 '참척(慘慽)'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소연 씨는 어린 시절 '낙원'으로 믿었던 북한을 목숨 걸고 탈출한 탈북 여성이자, 지금은 북한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아들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입니다. 2008년 탈북 전 자신에게 매달리는 6살 아들에게 "엄마가 중국 가서 돈 많이 벌어 올게. 두 밤 자고 올게"라고 다독이며 국경을 넘었지만, 그날이 아들을 본 마지막 날이 될 줄은 몰랐습니다.

*비욘드 유토피아 : 북한 주민의 생사를 건 탈북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지난해 선댄스영화제 관객상과 시드니영화제 최우수 국제 다큐멘터리 관객상을 받았다. 올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장편 다큐멘터리 예비후보에 선정됐다.

[스프] 더 스피커
이 씨는 북한으로 강제 송환돼 모진 고초를 당한 후 가까스로 재탈북에 성공해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2019년 자신을 만나기 위해 국경을 넘은 17살 아들이 강제 북송돼 14호 개천 관리소로 끌려간 이후 하루하루 기다림의 고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들이 끌려간 곳은 한 번 들어가면 생사조차 제대로 확인하기 어려운, 북한의 악명 높은 정치범수용소 중 한 곳입니다. 이 씨는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스스로를 원망하며 살고 있습니다. 과거 북한군 출신이었던 자신이 한국에서 '뉴코리아여성연합' 대표로 활동하며 북한 인권운동을 한 '전력' 탓에 아들이 관리소로 끌려갔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씨는 〈비욘드 유토피아〉 촬영 당시만 해도, 아들을 구출해 내기 위한 노력의 여정, 즉, 갈렙 선교회 김성은 목사와 함께 아들을 한국으로 탈북시키는 시도가 해피 엔딩으로 끝날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아들이 브로커의 신고로 중국 공안에 체포돼 관리소로 끌려가는 최악의 상황으로 흘러갔습니다. 결국 지난해 1월 선댄스 영화제 공개 직전까지도 아들에게 혹시나 해가 될까 봐 관련 영상들을 모두 삭제할지를 고민했지만, 오히려 더 많은 이들이 알아야 아들을 구해낼 수 있을 거라는 주변 사람들의 설득에 영상 공개를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북한 정권이 뼈아프게 여기는 인권 실태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역할에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 씨는 〈더 스피커〉와의 인터뷰에서 "하마스에게 6살 딸을 납치당한 아버지가 '고통의 시간을 견디지 말고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한 말에 공감한다"고 말했습니다. 평생 다시는 자식을 보지 못하더라도, 자식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는 이스라엘인 아버지의 그 문드러지는 마음을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자식이 너무 오래 살지 않기를 차라리 바라는 마음을 이해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의 아들이 고통을 어떻게든 견뎌서 다시 만난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했습니다. 이 씨는 "아들이 수용소 안에서 겪어야 될 그 모든 일을 생각만 하고 어떤 환경인지 상상만 하는 어미로서 너무나 미안하고 죄인된 마음"이라며 "아들이 꼭 살아만 있다면, 그래서 만날 수만 있다면 좋겠다"라고 흐느끼며 말했습니다.

〈더 스피커〉는 이 씨에게 영화가 개봉된 이후 아들의 소식을 접한 게 있는지, 그리고 언제 재회할지 모를 가족을 한없이 기다리는 삶의 무게란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를 물었습니다. 또, 최근 '북한 이탈주민의 날'이 7월 14일로 제정되고 탈북민 정책을 발굴한다는 취지의 '북배경주민과의 동행' 특별위원회가 출범된 데 대해서도 직접 당사자로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습니다. 다음은 이 씨와 나눈 일문일답입니다.
 

아들이 당한 고문을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이유

Q. 영화 〈비욘드 유토피아〉를 보신 분들도 있겠지만, 먼저 자기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A. 네, 저는 북한을 탈출해서 2008년도에 대한민국에 정착한 이소연입니다. 북한에서는 북한군 4군단 사령부에서 10년간의 군 생활을 했고요. 제대한 이후에 제 고향 함경북도 회령에서 살다가 탈출을 하게 되었습니다. 군대도 갔다 왔고, 조선로동당원이었고, 또 대학 교수 하시는 부모님도 계셨지만, 사실 하루 한 끼 생계유지라는 게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월급을 2,600원 정도 받는데 쌀 1kg에 5천 원 하는 북한에서는 개인 생계 활동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또 가정을 이루고 애까지 낳았는데 참... 정말 3일 가도록 애 입에 떠 넣어줄 식량조차 없는 그러한 환경에도 있었고요. 제가 나가서 시장에서 장사를 해보고 해도 그 생활이 나아지지 않아서 탈출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그러다 한 번 북송도 됐고, 이후 두 번째 탈북을 다시 시도해서 2008년도부터 대한민국에 들어와서 지내고 있습니다.

Q. 홀로 2008년도에 재탈북에 성공하기 전, 강제 북송을 당하시기도 했는데, 어쩌다가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된 건가요?

A. 네, 2006년도에 처음 북한에서 탈출할 때에는 '중국 식당에 가서 그릇 닦아주는 일만 해도 북한에서 버는 것보다 몇 백 배는 더 번다', 이런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브로커에게 의지해서 강을 건넜습니다. 그런데 중국에 와서 마중나온 브로커를 보니, 저한테 돈을 벌게 해 줄 마음이 없는 브로커였습니다. 중국으로 건너간 다음 날, 저 말고 또 다른 북한 여성 2명 정도가 또 탈출해서 왔는데, 가만히 보니 인신매매를 하는 브로커였습니다. 그래서 몇몇 여성은 '어차피 나는 북한 싫어서 나왔으니, 중국 어디라도 팔려가서 그냥 살겠다', 이렇게 마음 아프지만 자포자기하듯 말한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저 말고 청진에서 온 친구도 있었는데, 그 친구도 돈을 벌고 북한에 있는 남자친구에게 돌아가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저랑 둘이서 브로커를 중국 공안에다 신고한 뒤에 어떻게든, 다른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지를 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밤에 그 브로커의 신분증을 훔치고 다음 날 신고를 하려고 했는데, 바로 그 당일 새벽에 브로커한테 들켜버렸습니다. 그래서 매를 엄청 얻어맞았고, 둘 다 꽁꽁 묶인 상태로 북한에 강제 송환됐습니다.

Q. 당시 강제 북송된 이후 곧바로 수감이 되었고, 고초도 많이 겪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당시 상황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스프] 더 스피커
A. 네, 저희가 들어가니까 처음에 몸 안에 돈이 있는지를 조사를 한대요. 그래서 몸 여기저기, 심지어 항문까지 다 들여다보고, 그다음에 머리 묶고 있는데 그 고무줄까지 풀어서 머릿속까지 다 들여다봅니다. 머리를 예쁘게 들여다보겠어요? 이리 끌고, 저리 끌고 그냥 배 걷어차고 하면서 하다가, 처음 한 이틀 동안은 전혀 안 부릅니다. 안 부르고 일단 그 공포심을 주는 거예요.

그렇게 공포심을 주고, 그다음 이틀 지나서부터 부르는데 처음에 들어가면 "조국을 배반했다"라고 하면서 그냥 하루에 3시간, 4시간씩 아침, 점심, 저녁으로 그냥 계속 때립니다. 뭐 대답할 이런 틈도 안 주고 그러다가, 본인들 손바닥이 아프면 신발 벗어서 구두짝으로 때리고... 옆에 몽둥이 같은 거 이미 다 가지고 있더라고요. 고문장도 아닌데 일반 사무실 안에 몽둥이, 회초리, 이런 걸 갖다 두고 때렸습니다. 그걸로 계속 맞다가 무릎을 이렇게 꿇고 앉았는데, 제 무릎 위를 구둣발로 걷어차는데 세상에 저는 정강이가 그렇게 부서지게 아픈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맞다가 기절하면 또 와서 물 뿌려서 또 일어나게 했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자기들은 퇴근하는데 밤에 불을 그쪽에 전기를 다 켜놓게 해 놓고는 잠을 안 재웁니다. 경비서는 사람 불러다가 우리가 왜 탈북했고 어디에 어떻게 갔다 왔고, 누구를 만났고 이런 걸 쓰는데 그거를 밤새 4번, 5번, 10번 계속 반복시킵니다. 그리고선 토씨 하나 틀리면 또다시 써라. 또 때리고 또다시 써라 또다시 써라...

그렇게 조사를 1년 8개월, 1년 9개월 정도를 받았습니다. 제가 사는 지역이 회령이었는데 회령시 보안소에서 그렇게 조사를 받고, 그다음에 뭐 탈북 한 번 했던 사람은 '노동 단련형' 같은 걸 주거든요. '노동 단련형', 이거는 신분증이 박탈이 안 되는 거예요. '교화'부터는 박탈이 되고요. 그래서 거기서 끝나고 노동 단련형 6개월 받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맞고 나왔는데, 그다음부터는 또 일을 못한다고 또 때립니다. 노동을 시키는데 집 건설, 광산 건설... 강물 위에 다리 세우는 거, 또 석회석 광산에서도 일하고요. 그런데 기계가 없이, 손으로 캐니까 정말 일 못 한다고, 또 힘이 없으니까 때리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Q. 북송되기 전, 아들과 헤어졌을 때 아들 나이가 6살이었다고 하셨죠. 당시 아들을 데리고 탈북을 할지 고민이 많이 됐을 텐데, 결과적으로 혼자 탈출을 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A. 그때 당시 브로커들이 일단은 애가 있는 걸 원하지 않았어요. 브로커들이 "가서 네 몸도 숨어서 살아야 하는데, 변변히 네 몸도 챙기지 못하는데, 그런 속에서 어떻게 자식까지 거기다 내놓고 살겠냐"라고 했어요. 그래서 사실 그 고민의 시간이 좀 길었습니다. 정말 탈북해 가서 돈을 벌어야 되나, 아들은 어떻게 하나. 이런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저기에 좀 조언을 좀 구하다 보니까, 다들 하는 말이 남자 애들 같은 경우는 중국 가게 되면 애를 뺏어서 따로 팔아버린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저희 어머님도 '네가 탈북이 성공할지도 모르는데 어디에 그 핏덩이 같은 걸 데리고 다니냐'라고 말렸습니다. 그게 그냥 정말 탄탄대로처럼, 이렇게 잘 된다는 보장이 있었으면... 참 좋았겠죠.
 

"초주검이 된 채 수용소로 끌려간 아들"

[스프] 더 스피커
Q. 영화가 개봉된 이후의 상황, 최근에는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A. 아들이 북송된 이후에 처음에는 함경북도 보위부에서 얘가 조사를 받는다라고 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브로커들을 통해서 조사를 어떻게 받고 있는지를 알아보는 중에, 한 6개월 정도 있다가 애가 그냥 없어진 걸 알게 됐어요. 저희는 그렇게 '없어졌다'라고 할 때에는 알거든요. 일반 교화소나 일반 수감 기관에 가게 되면, (북한 당국에서) 가족한테 "어디에 가 있으니까, 면회를 가라", 이런 걸 알려줍니다. 그런데 정치범 수용소 같은 경우는 안 알려주거든요. 그거는 절대로 안 알려주고... 실제 그 애를 데리고 인솔하는 보위 지도원, 그 간부들 사이에서도 지역과 지역 사이를 이동할 때마다 암호가 달라집니다. 그렇게 어느 수용소로 갔는지를 모르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파악한 바로는, 그렇게 6개월 정도 애가 고문과 조사를 받고, 갈비뼈가 부러지고 초주검이 된 상태에서 수용소로 갔습니다. 지금 14호 수용소에 갔다는 건 알았고요. 그 안에서 선전 선동하는... 원래 그림을 잘 그려갖고 뭐 그림도 그리고 있고, 살아는 있다.

Q. 천만다행이기는 하지만, 그 소식을 접하셨을 때 억장이 무너지셨을 것 같아요.

A. 제가 이스라엘-하마스 전쟁 초기에, 6살 딸을 하마스에 뺏긴 이스라엘인 아버지가 뉴스에서 하던 얘기가 너무 공감이 됐어요. 그 아버지가 그 딸한테, '어린 나이에 거기에서 고통의 시간을 견디지 말고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얘기를 뉴스에서 하더라고요. 저도 가끔은 그런 생각합니다. 사실은 죽지 못해서 그 고통을 참 그렇게 견뎌내야 내는 게 얼마나 힘들까, 얼마나... 그럴까라는 생각이 들고. 그래도 제가 더 기다리는 건, 그래도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는 만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Q. 수용소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는 건가요?

A. 수용소 안에서 나왔던 사람들은... 제가 여기에서도 많이 알아봤어요. 수용소에서 경비를 서셨던 분들, 그다음에 수용소 안에 있었는데 나오신 분들. 그런 분들 많이 찾아다니면서 들어보니까, 뭐 어쨌든 짧아야 10년, 15년의 시간이 지나면 일반 수용시설로 넘어갈 수도 있고, 또는 수용소는 아니지만 '18호' 시설처럼 그냥 이렇게 울타리 쳐놓고 감금 형태로만 하는 이런 데로 나올 수도 있고요. 그런 데서 또 '해제'라는 것도 받을 수가 있대요. 해제민처럼. 그래서 지금 당장은 수용소 안에서의 어떤 큰 변화는, 전혀 기존부터 없었기 때문에 기대는 안 하지만은... 아들이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살아 있다 보면, 10년, 15년이라는 시간을 견디다 보면 그래도 조금 환경이 나아진 대로 이동해서, 조금 좋은 소식도 내가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은 해 봅니다.

Q. 영화에 아들과 관련한 내용을 담을지를 두고서도 고민이 많았을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감독님을 포함한 다른 분들이 '오히려 이 내용이 다 알려지는 게, 아들을 지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얘기를 했고, 그에 대해 설득이 된 상황인 게 맞나요?

A. 네, 사실은 뭐 탈북민들이 저 같은 아픔을 안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저보다 더 기구한 사연도 있고... 저처럼 자식을 그렇게 보내신 분들도 굉장히 많더라고요. 근데 저는 애가 지금 수용소까지 간 상황에서... 사실 이 영화를 시작할 때에는 해피 엔딩으로 끝날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처음에 영화에도 참여를 시작했던 거예요. 해피 엔딩으로 잘 끝나서 우리 애가 정말 원하는 걸 하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건데... 중간에 사고가 나고, 그리고 두 번째 가족(영화에 출연하는 또 다른 탈북 가족)도 들어오고... 그러면서 사실 이 영화가 이렇게 만들어지게 된, 정말 의도치 않았던 게 만들어진 거거든요.

그래서 애한테 어떤 피해가 가지 않을까 저는 그 생각을 제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영화 이미 찍어놨던 분량들 다 빼줘라, 실제 선댄스 영화제 지난해 1월에 가기 전까지도 저는 빼고 싶다, 나는 영화제에도 안 가고 싶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감독님도 '소연 씨가 빼라고 하면 우리는 뺀다. 절대 강요 안 하겠다' 다들 그런 의사를 보이셨어요. 그런데 옆에서 또 많은 분들께서 '북한에서는 오히려 이게 널리 알려졌을 때, 애가 살아가는 게 좀 더 낫지 않겠느냐. 바깥에서 애를 주시하고 있고, 국제사회가 지금 엄마가 기다리며 바라보고 있다는 걸 북한에 메시지를 주는 게 오히려 애를 살릴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라고 했어요. 실제로 찾아보니 그런 사례가 좀 있긴 었었더라고요. 그리고 수용소 안에 있는 아들이, 제가 영화 공개를 안 한다고 해도 더 나빠질 게 없는... 그런 수용소에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게 (영화 영상을 예정대로 공개) 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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