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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멘터리] 쓸쓸한 너와 나의 아파트 "콘크리트 유토피아"

이주형 기자의 씨네멘터리 #80

한국 최초의 아파트 단지는 1964년 최종 완공된 10개 동 642 가구의 '마포 아파트'다. 국내 처음으로 엘리베이터와 중앙 난방시스템이 들어올뻔 했으나 너무 호화롭다는 여론의 지탄을 받아 없던 일이 됐다.

하지만 연탄 보일러 개별 난방과 수세식 화장실(일부 가구는 양변기도 설치)만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주거 시설이었다. 처음에는 아파트라는 낯선 주거 형태에 좋지 않은 소문까지 돌면서 미분양이 되기도 했지만, 한국 영화사의 걸작 "오발탄(1961)"을 만든 유현목 감독 등 유명인들이 하나 둘 입주하면서 장안의 명물로 부상했다. 아파트는 중상류층 이상이 사는 곳이라는 이미지도 이때부터 생겨났다.

1차 완공 당시 마포 아파트 / 국가기록원
마포 아파트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주택 사업 중 하나로 추진된 야심찬 사업이었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자 대통령 직무대행이었던 박정희 대장은 1차 준공식 치사를 통해 "현대적 시설을 완전히 갖춘 마포 '아파아트'의 준공은 생활 혁명을 가져오는 계기"이며 "봉건적인 생활 양식에서 탈피하여 현대적인 집단 공동생활 양식"으로 "장치 입주자들의 낙원을 이룸으로써 혁명 한국의 상징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그런데, 만일 어떤 아파트의 이름이 '황궁아파트' 또는 '드림팰리스'라면? 입주민들의 '낙원을 꿈꾼' 한국의 아파트 도입 당시 취지에 딱 부합하는 브랜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황궁'이란 단어는 너무 봉건적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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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31일은 "범죄도시3"가 개봉한 날이다. 바로 이날 "드림팰리스"라는 독립 영화도 조용히 극장에 걸렸다. "범죄도시3"는 1000만 명이 봤고, "드림팰리스"는 그 1/1000인 1만 명이 봤다. 하지만 "드림팰리스"같은 영화가 없는 천만 영화 시장이라면 그게 과연 유토피아일까 싶다.

"드림팰리스"는 30대 중반의 가성문 감독의 야심찬 장편 데뷔작이다. 가감독이 태어난 1988년은 국내 최초의 아파트 단지인 마포 아파트의 '재건축'이 확정된 해다.

"드림팰리스"는 '드림팰리스'라는 신도시 미분양 신축 아파트에 입주하는 한 싱글맘이 겪는 일들을 통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참사 농성장의 속살을 용기있게 드러냈고, 아파트란 한국인들에게 무엇인지, 관계와 믿음이란 게 때로는 얼마나 가벼운가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했다.

영화 "드림팰리스"의 한 장면 / 인디스토리
아파트 공화국의 민낯을 보여줬다는 면에서는 이번 주 개봉한 같은 80년대생 엄태화 감독의 역작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예고편, 독립영화 버전이기도 하다(여기서 '예고편'이란 표현은 '맛보기'란 뜻으로 쓴 것은 아니다).

산업 재해로 남편을 잃고 회사 앞에서 오랫동안 농성장을 지켜오던 혜정(김선영)은 지칠대로 지쳐 회사와 타협한 뒤 합의금을 받아 신축 아파트인 '드림팰리스'에 입주한다. 하지만 이름과 달리 욕실에서 녹물이 나오고 시공사는 미분양이라 당장은 하자 보수도 어렵다고 배짱을 튕긴다.

직접 미분양을 해결해보겠다며 나선 혜정은 같이 농성하던 지인을 설득해 할인 분양을 받아 입주할 수 있도록 주선하지만 기존 입주민들은 할인 분양받은 사람들은 입주가 불가하다며 바리케이드까지 치며 이사오는 사람들을 막아선다. '구별짓기'는 한국의 아파트 문화에서 많이 발생하는 문제다.

이 영화에서 어마어마한 연기를 보여준 배우가 있으니 바로 김선영 배우다. 이 영화에서의 열연으로 아시안필름페스티벌에서 여우주연상을 받기도 했다. 김선영은 영화 내내 빛나는 연기를 보여주지만 특히 후반부에서 남편의 결백을 확인받고 눈물을 삼키는 장면은 연기라 부르기 미안할 정도의 디테일로 관객들의 숨을 멎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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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t to "콘크리트 유토피아" 씬 #16. 금애의 집. 낮)

"솔직히 지금 들어와 있는 외부인 태반이 저기 드림팰리스 인간들인데 거기가 평소에 우릴 얼마나 무시했어. 지들 단지에 발도 못 들이게 하고. 학군 섞인다고 데모하고 아주 지랄을 하고, 막말로 입장 바뀌었음, 단지에 발도 못 붙이게 했겠죠, 안 그래요?"

"콘크리트 유토피아" 초반에 나오는 김선영 배우의 대사다. 김선영 씨는 황궁아파트 부녀회장 금애 역을 맡았다. 조연이다.

우연의 일치 치고는 매우 흥미롭다. 본인이 주연으로 나오는 "드림팰리스"와 조연으로 나오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나오는 아파트의 이름이 '드림팰리스'로 똑같다니. (심지어 "드림팰리스"에서 입주자 대표로 나오는 김용준 배우도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황궁아파트 입주민으로 나온다)

한국적 시츄에이션에서 고깃집은 가든이고, 아파트는 팰리스. 드림팰리스는 명백히 타워팰리스의 빗댄 작명이다. 하지만 영화 "드림팰리스"의 드림팰리스는 녹물이 나오고 미분양이 발생한 이름만 번지르르한 빛 좋은 개살구 아파트인 반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 나오는 드림팰리스는 어제까지만 해도 황궁아파트 앞에 멀쩡히 서있던 고급 아파트다.

그런데 서울 강남에 아파트가 "마치 단층 운동에 의한 지각의 융기처럼" 솟아오르던(황지우, 박해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재인용) 것과는 반대로 서울을 덮친 대형 지진으로 모든 건물이 초토화되고 황궁아파트만 간신히 살아 남았다. (황궁아파트가 무량판 구조인지 벽식 구조인지 라멘 구조인지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슬픔의 삼각형"에서 청소부와 호화유람선 승객들의 처지가 배가 난파하면서 180도 바뀌었듯, 드림팰리스 주민과 황궁아파트 주민들의 입장도 지진으로 완전히 역전됐다. 평소 복도식 황궁아파트 주민들을 무시하던 드림팰리스 주민들은 살기 위해 황궁아파트로 몰려 든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 중 부녀회장 김선영의 발언 장면 / 롯데엔터테인먼트
김선영의 저 대사는 지진이 발생한 뒤 황궁아파트 주민들이 모인 첫 회의에서 나온 발언이다. 추운 겨울, 생존 물자는 떨어져 가고 구조는 감감무소식, 주민들은 자신들의 아파트에 모여든 드림팰리스 주민들을 포함한 외부인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인다.

결국 황궁아파트 주민들은 외부인들을 자신들의 아파트에서 내쫓기로 결정한다. 어떻게? 민주적인 투표로. 그날 밤, 잠 못 이루는 602호 신혼 부부인 명화(박보영)는 남편 민성(박서준)에게 침대에서 말을 붙인다.

명화: 그건 어떻게 생각해? 사람들 다 내보낸다는 거.
민성: (대충) 어떻게 내보내겠지.
명화: 내보내면?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가.
민성: 아이 몰라. 그만 생각하고 자자.


'어떻게 되겠지', '몰라, 그만 생각하자'는 딱 지금 우리 사회가 작동되는(이라기 보다 '굴러가는') 방식의 일부처럼 들린다. 그게 아니고서야 어찌 저리 무심한 말들과 무책임한 행동과 몰염치한 행태가 반복될 수 있을까. 책임이야 선출직들이 더 크지만 그렇다고 필자를 포함한 시민 개개인이 무조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폭력으로 외부인들은 몰아낸 황궁아파트 주민들. 그러나 황궁아파트 입주민만 남았다고 구별짓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황궁아파트 자율방범대의 조장들은 세입자는 안되고 자가(自家)인 사람만 맡을 수 있다고 하는가 하면, 생필품 배급도 기여도에 따라 차등 분배된다. '주민수칙' 제3항에 나오는 민주의 이름으로.

황궁아파트에 숨어 살거나 밖에서 황궁아파트 진입을 호시탐탐 노리는 외부인들은 '바퀴벌레'로 불린다. 이 역시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피아를 식별하는 극단의 언어와 닮아있다. 황궁아파트의 '평범한 사람들'이 그렇게 변해 간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세 번째 장편 연출인 엄태화 감독은 제작비 180억 원의 부담에도 자신의 예술적 야망을 다 내려놓지 않고 밀어 붙였다. 제작사인 클라이맥스 스튜디오의 변승민 대표는 엄 감독이 자분자분하게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더라고 농반진반으로 뒷얘기를 전했다. 재난 환경을 묘사한 CG는 조금 아쉽지만, 아파트 세트 같은 미술은 현실감을 주기에 부족하지 않다.

시퀀스에서 시퀀스를 넘기는 비주얼과 편집이 아귀가 잘 맞아 떨어지며 잦은 플래시 백에도 불구하고 흐름을 해치지 않는다. 특히 영화 전반부와 후반부를 가르는 이병헌의 아파트 노래 씬은 조명과 카메라 프레이밍, 연기 등 모든 것이 잘 맞아 떨어진 명장면으로 기억에 남는다. 다만 영화 오프닝과 중반, 엔딩의 핵심 장면 모두를 긴 줌 아웃 씬으로 처리하는 방법 외에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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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배우는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는 조연이라,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드러낼 만한 분량까지는 부여 받지 못했다. 하지만 아파트 부녀회장 역을 그녀가 아니면 누가 더 잘했을까 싶은 정도의 존재감을 보여준다.

한국의 아파트(문화)를 소재로 영화를 기획 중인 감독이나 제작사는 반드시 김선영을 캐스팅 하시라. 아파트 이슈에 관한 한 가장 준비된 배우일지니.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김선영 배우도 본인만의 아파트 트릴로지를 완성해줬으면 좋겠다. 한국 사회를 찐하게 축소한 두 편의 아파트 역작을 찍었으니 다음 편에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많이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이병헌의 영화라고 하던데 이 글에서는 왜 별 말이 없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할 말은 많지만,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이병헌은 그냥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촬영장의 이병헌 / 롯데엔터테인먼트
얼떨결에 황궁아파트 주민대표가 되는 영탁이라는 단순하고도 복잡한 인물을, 어리숙하고도 영악한 인물을, 선악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어쩌면 동물에 가까운 캐릭터를, 배우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표현해냈다. 호흡 하나, 자세 하나, 돼지털 같이 뻣뻣한 모발 한올 한올로도 연기한다.

지난해 여름시장 "비상선언"에 이어, 재난 영화의 외피를 두른 한국 사회 톺아보기 영화에 잇달아 출연하며 같은 세대의 스타 배우들과는 조금 다른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이 병헌은 "콘크리트 유토피아"로 자신의 현재 위치가 스스로 쟁취한 것이며 앞으로도 그 자리에서 제 발로 내려올 의사는 없다고 선언한다. 고사성어 애드립(대본과 다르기 때문에 애드립이리라 추정해본다)과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르는 씬에서처럼 능청스런 유머로 여유도 잃지 않은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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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방문한 외국의 어느 유명 건축가가 올림픽대로를 지나며 했다는 말이 있다. '이런 멋진 한강 뷰를 서민들에게 양보하다니, 한국은 참 민주적인 나라같군요.'

귀족 문화 영향이 큰 유럽에서는 불특정한 수백 수천 세대가 다닥다닥 붙어사는 아파트 문화를 선호하지 않는다고 한다. 아파트에는 주로 서민층이 살고, 오래된 아파트는 빈민가로 전락하기 일쑤다(지난해 말 개봉했던 "가가린"이란 프랑스 영화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상황이 다르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엄태화 감독이 읽었던 책 "콘크리트 유토피아(2011)"에서 제목을 따왔다. 이 책의 저자인 박해천 교수는 의인화한 아파트 시점에서 서술한 1부 2장 '아파트의 자서전'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썼다.

"나(아파트)는 설계자들의 의도를 넘어서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조용히 숨을 죽인 채 인간이 아니라 내 자신에게 최적화된 세계를 상상하며 기회가 오길 기다렸다. 나는 내 몽상이 직조해낸 세계에 '콘크리트 유토피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구절을 읽다 광화문 교보문고 입구에 써 있는 글귀가 떠올랐다.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

군사 정권의 정치경제적 필요에 의해 탄생한 주거 문화 양식인 아파트는 오늘날 설계자들의 의도를 훨씬 뛰어 넘어 스스로 생물처럼 움직인다. "사람은 아파트를 만들고 아파트는 사람을 만든다."

지난 1991년, 평촌 신도시 아파트 불량 레미콘 시공이 큰 사회적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검찰이 수사에 나섰고 건설사들은 재시공에 들어갔다. 데쟈뷰. 부실 시공은 오늘날 '순살 아파트'로 반복된다. 와우 아파트가 무너진 게 50년 전인데 아직도 '철근 빼먹기'가 반복되고 노동자도 죽어 나간다. 부실 시공과 영끌 투자, 집값 폭등과 집값 폭락 등으로 한국 사회에서 아파트는 유토피아인 동시에 디스토피아이기도 하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던지는 질문들도 과거, 현재,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질문들이다. 입추를 넘어 바람이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저런 상황에서 과연 나라면 어떻게 할까'하고 생각하게 하는 영화다. 아파트에 살든 안 살든 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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