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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도연만이 전도연을 넘어설 수 있다

[인터뷰] 전도연만이 전도연을 넘어설 수 있다
하드보일드 느와르 장르에서 여성은 대상화 된 존재였다. 영화 초·중반까지 액세서리처럼 활용되다 맥락 없이 사라지기 일쑤였다. 어떨 때는 남자 캐릭터의 인생과 결정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민폐 캐릭터로 전락하기도 했다.

전도연만큼은 달랐다. 영화 '무뢰한'(감독 오승욱, 제작 사나이 픽처스)을 선택하며 감독에게 당부한 건 딱 한 가지 "여성 캐릭터를 대상화시키지 말자"는 것이었다. 전도연은 시나리오상에 압축적으로 표현돼있던 김혜경이라는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연기해내며 '무뢰한'을 기어이 전도연의 영화로 만들어버렸다.

'무뢰한'의 성취는 전도연에게 상당 부분 빚을 지고 있다. 배우가 작품을 깊이 있게 흡수하고, 캐릭터를 폭넓게 이해할 때 영화 전체에 어떤 긍정적 영향을 미치는 지를 몸소 보여줬다. 그 영향력은 감독에게 영감을 선사했고, 배우들을 자극하는 데까지 뻗쳤다. 

전도연이 좋은 배우란 건 새삼스러울 것 없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칸영화제 여우주연상이라는 트로피가 주는 명예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지난 24년간 한 길을 걸으며 남긴 작품과 캐릭터, 그 실제적인 기록이 전도연이라는 배우의 명성과 권위를 뒷받침한다.

'무뢰한'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놀랐다. 아직도 전도연의 연기를 보면서 감탄할 수 있다는, 그 쾌감에 말이다. 더 놀라운 건 이 영화와 캐릭터가 끊임없는 자기 의심 아래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여배우는 여전히 자신을 괴롭히며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단언컨대, 전도연을 넘을 수 있는 배우는 오직 전도연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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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많은 시나리오가 최우선으로 가는 배우다. 이 작품의 어떤 부분에 마음이 움직였나?

A. 일단 시나리오가 굉장히 좋았다. 하드보일드의 중심이 멜로라는게 좋았다. 그들을 움직이는 힘이 폭력적인 게 아니라 사랑 때문에 흔들리는 거 말이다. 서로에게 무뢰하게 되고 감정적으로 무너지게 되고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점의 감정들이 인상적이었다.

Q. 언론시사회 때 영화를 처음 봤다고 들었다. 그때 받은 느낌을 떠올려본다면?

A. 영화를 처음 봤기에 긴장이 많이 됐다. 감독님이 표현하고자 하는 부분들이 100% 만족스럽게 드러났다고는 할 수 없지만, 의도가 보이고 느껴지는 것 같았다. 감독님은 솔직한 영화를 찍고 싶어 하셨던 거 같다. 나 역시 솔직한 스토리 안에서 구체적 인물을 표현하려고 했는데 그 작업이 쉽지는 않았다. 칸에서 마지막으로 영화 보고 이제 그만 봐야겠다 싶더라. 처음엔 긴장하면서 보지만 두 번, 세 번은 놓친 부분이 크게 들어오니까.

Q. 처음 봤을 때의 모호한 느낌은 관객이 더 클 것으로 생각한다.

A. 우리 영화가 관객들이 원하는 답을 주는 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그게 이 영화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 말로써 누군가에게 원하는 걸 이야기할 수 있을까...그건 말일 뿐이고, 그래서 그들은 행동으로 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이 더 안타깝고 연민이 간다. 그런 순간들이 우리 영화에는 끊임없이 등장한다.

Q. 오승욱 감독이 여자를 너무 모른다는 말을 했다.

A. 영화를 여러 번 보니 감독님이 여자만 모르는 게 아니라 인간들과의 소통에 대해서 모르시는 분이 아닌가 싶더라. 시나리오상에서는 김혜경이 함축돼 표현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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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시나리오상에는 김혜경이 입체적인 인물이 아니었다는 말인가?

A. 처음엔 김혜경이 대상화돼 있는 것 같았다. 난 여자로서 매력을 어필해야지가 아니라 그들과 어떻게 섞이고 살아남는지를 표현하고 싶었다. 그녀가 사는 세상은 좀 더 치열할 것 같았다. 그게 일상적이라서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니라 누구랑 부딪치고 하는 건 늘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이 아닐까. 그런 걸 표현하고 싶었다. 다행히 감독님께서 나에게 많이 맡겨주셨다.

Q. 전도연의 몸에 들어온 김혜경은 놀라울 정도로 입체적이었다.

A. 쉽지는 않았다. 시나리오를 읽고 감독님에게 "이 여자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것 같고 오히려 그녀가 남자에게 무뢰한 같다"고 말했다. 더 솔직히 말해 그녀가 그러한 환경과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여자 같지가 않았다. 나는 그것만으로는 인물을 이해하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Q. 그런 김혜경의 강인함이 드러났던 장면이 돈을 받으러 가서 "나 김혜선이야!"라고 외치는 신 아니었나 싶다.

A. 맞다. 그때 입은 빨간 원피스, 난 그걸 김혜경의 전투복이라 생각했다. 전투복을 입고 돈을 받으러 가는 모습, 돈을 받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이 곧 김혜경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은 찍을 때도 그랬고, 보면서도 가슴이 아팠다. 혜경의 가장 처절한 순간이다. 자존심 하나만 지켜온 여잔데 그 순간에는 무너진다. 또 혜경의 그런 모습을 놀이처럼 흥미롭게 지켜보던 재곤이 혜경을 달리 보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한다. 

Q. 한복을 입고 가게 명함을 돌리는 장면도 인상적이더라.

A. 시나리오에 '선녀 같은 한복을 입고'라고 정확하게 표현이 돼 있었다. 감독님한테는 어떤 상징 같은 이미지로 보였던 거 같다. 그런데 난 그 장면이 불편해서 "꼭 한복을 입어야 하느냐"고 했다. 결국, 한복은 입되 어깨에 띠만이라도 빼달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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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그런 디테일들이 초반 김혜경의 이미지와 성격 구축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A. 그 신은 남자들이 정말 좋아하더라. 여름이었는데 무척 더웠다. 한복에 모기도 들어갔고... 남자들이 여자를 보는 이미지가 특이하단 생각을 했다. 단순하고 직접적이랄까.(웃음)

Q. 정말이지 다채로운 표정으로 인물의 감정을 담아내더라. 눈꺼풀, 눈썹 등 얼굴 근육을 이용해 인물의 감정변화를 시시각각 보여준 느낌이랄까?

A. 그런 건 계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게 말이 아니다 보니 감정에 집중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온 것들이다.

Q. "상처 위에 상처,  더러운 기억 위에 더러운 기억을 얹다" 라는 문어체 대사가 아름다우면서도 구슬프게 다가왔다.

A. 영화 속에서 처연한 여성 캐릭터들을 많이 맡았는데도 자기 연민에 취해있었던 적은 없었던 거 같다. 그런데 이번에 "상처 위에 상처" 이 대사에서는 느껴졌다. 자기가 자기 상처를 돌아볼 기회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나도 누군가를 통해서 나 자신을 돌아보는데 김혜경도 그런 순간이 아닐였을까 싶다. 내 몸에 난 상처가 아니라 그 사람 몸에 난 상처를 보고 자신을 바로 보게 된다. 이 남자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거...상처받은 짐승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는 신이었던 거 같다.

Q. 만약 김혜경이 정재곤과 살았다면 행복했을까?

A. 나 역시 그런 생각을 해본 적 있다. 그녀는 늘 누군가에게 선택되어서 살았다. 그게 내 것이고 사랑인 줄 알고 최선을 다했다. 만약 김혜경이 가슴이 아닌 머리로 사는 여자라면 본인이 이용당하는 걸 알 텐데 그녀는 그걸 사랑이라고 믿는다. 아마도 혜경이 누굴 선택해서 감정을 준 건 정재곤이 처음일 것이다. 그래서 "나 여기서 도망쳐서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말을 할 때 사랑 고백보다 절실하게 느껴졌다. 정재곤이란 잘 됐다면 그녀는 계속 스스로 선택한 삶을 살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봤지만, 역시나 쉽지 않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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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힘든 캐릭터다 보니 감독이 의지하게 되는 경우가 많을 텐데?

A. 나는 감독에게 많이 의존하는 스타일이다. 영화 찍는 과정은 큰 판에 퍼즐을 엎고 다시 조합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근데 전체적인 그림을 본 건 감독님뿐이다. 배우는 잘 해나가고 있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다. 걔다가 그 안에 빠지다 보면 전체적인 감정을 놓칠까 봐 더 긴장한다.

게다가 영화는 시나리오 순서대로 찍는 게 아녀서 연기가 과할 수도, 덜할 수도 있다. 그건 감독님의 그림 안에서 조율해야 한다. 감독님이 김혜경에 대해서 믿고 맡겨주었지만 포기하지 않게 격려도 해주셨다. "아 뭐 이렇게까지 이렇게 가죠" 할 수도 있었는데 배우를 북돋워서 끝까지 갈 수 있게 하셨다.

Q. 현장에서 "나 잘하고 있어?"라고 쓴 메모가 화제가 됐다.

A. 아…. 부끄럽다. 그게 보도자료를 통해 공개될 줄은 몰랐다. 진상 씨라고 메이킹 필름을 찍는 분이 있다. 작품에서 여러 번 만난 분이라 개인적으로 친하다. 게다가 그분은 작품을 굉장히 잘 보고 냉정하게 조언도 많이 해준다. 그래서 내가 이것저것 물어볼 때가 있다. 그 쪽지도 그렇게 쓰게 된 거다. 그걸 본 뒤 그분이 "뭘 그렇게 의심해? 불안해?"라고 묻더라. 내가 잘하고 있는지 제대로 하는 것인지 끊임없이 확인받고 싶을 때가 있다.

Q. 경험해보지 않은 인생과 캐릭터를 매번 능숙하게 연기하는 비결이 뭔가?

A. 경험을 통해 캐릭터를 이해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 내가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 인물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로 내가 겪지 않았지만 읽으면서 이해되고 공감되는 지점이 있지 않나. 영화도 연기도 마찬가지다. 그 캐릭터를 계속 생각하고 이해하려고 한다. 흉내만 내는 데 그치지 않기 위해 내 안에 그런 면을 끄집어내려고 노력한다.

Q. '무뢰한'으로 칸영화제 4번째 초청을 받았다. 출국 전 "그곳에서 받게 될 자극이 기대된다"고 했다. 어떤 의미인가?

A. 칸영화제에서 '밀양'으로 상을 받은 후 영화제 측에서 '이 여배우의 다음 작품은 뭘 할까'를 늘 궁금해하고 지켜봐주신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난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면서 세계적인 감독과 배우의 작품들을 많이 봤다. 그때 느낀 게 '아 이런 분들은 고집스러움을 놓치지 않고 가져가는구나'였다. 그러는 동시에 한국에서는 전도연이지만 거기에서는 "누구? 전도연? 아..." 이런 것도 느꼈다. 그곳에서는 나의 존재가 작게 느껴지니 거기서 오는 자극도 크다. "나 이제 칸에 왔으니까 됐어"가 아니라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구나"라고 자극을 받고 "다음 작품은 더 열심히 해야지"라고 마음을 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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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혹시 배우가 되지 않았다면 뭐가 됐을까? 어릴 때 꿈이 궁금하다.

A. 어릴 때 꿈은 현모양처였다. 사람들이 "꿈이 뭐에요?"라고 물으면 "저는 요리도 잘하고요. 남편이랑 아기 낳고 행복하게 살 거예요"했다. 그러다 우연히 광고 모델로 데뷔를 하게 됐고, '접속, '해피엔드'를 찍으면서 연기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Q. 본인이 생각하는 연기의 매력이랄까. 연기하면서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언제인가?

A. 연기도 연기지만 작업 과정이 너무 즐겁다. 한 편의 영화를 위해 70~80명의 사람이 촬영 현장에 모인다. 그곳에서 서로의 생각을 공유하고 하나로 좁혀가면서 영화가 완성된다. 그런 현장이 행복하니 더욱 집중하게 되는 거 같다. 그 순간들이 자유롭고 좋다.

Q. 배우 전도연을 자극하는 것이 있는지 궁금하다.

A. 그런 게 꼭 있어야 하나. 누군가에게 자극을 받았다고 해서 열심히 하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나는 자신에게 그리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만족을 잘하지 못한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한다. 그래서 나 자신에게 감사할 때도 있다.

너무 힘들 때는 내가 연기를 막 해도 사람들이 "전도연이 콘셉트로 했겠지 그냥 막했겠어"하거나 "우와 전도연이 저런 콘셉트의 연기를 하는구나"할텐데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웃음) 그러나 순간 순간 타협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특별한 자극보다는 나 자신에게 집중하고 노력하는 게 중요한 것 같다.

Q. 지금의 전도연에게 목표라는 게 있을까?

A. 글쎄…. 나는 어차피 계속 이 일을 해나갈 것이라 당장 목표를 잡는 건 의미가 없다고 느껴진다. 어느 순간 배우가 해야 할 일인 동시에 하고 싶은 일이 됐다. 이제 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연기하기엔 무모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원하는 순간까지 연기할 수 있는 것 그게 목적이다. 목표가 아니라.

Q. '무뢰한'의 개봉에 맞춰 전도연 특별전이 열렸다. 총 5편이 상영됐는데 빠진 작품 중에 이건 아쉽다 하는 영화가 있다면?

A. '멋진 하루'도 빠져서 아쉽고, '내 마음의 풍금'도 아쉽다. 개봉 당시 이후로 못 본 작품들이 많다. 시간이 되면 다 챙겨보려고 한다.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사진 김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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