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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무뢰한', 하드보일드 멜로라는 스타일과 장르의 개척

[리뷰] '무뢰한', 하드보일드 멜로라는 스타일과 장르의 개척
'무뢰한', 비정하게 그려낸 밑바닥의 사랑 
삶의 무게와 혼돈 그려낸 전도연·김남길의 열연
15년 만에 귀환한 오승욱 감독의 저력     


'무뢰한'(無賴漢)은 '무례한'과 헷갈리기 십상이다. 태도와 말에 예의가 없다는 뜻의 무례한과 누구에게도 소속되거나 의지하지 않은 사람을 뜻하는 무뢰한은 엄연히 다르다.

오승욱 감독은 연출의 변에서 "누구에게도 소속되거나 의지하지 않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지만 그 본질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혹은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선과 악을 가리지 않고 어느 방향으로든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라고 '무뢰한'을 새롭게 정의했다.

정재곤(김남길)은 범인을 잡기 위해선 어떤 수단이든 마다치 않는 형사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 잠적한 박준길(박성웅)을 쫓고 있다. 준길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실마리는 애인인 김혜경(전도연)뿐이다. 재곤은 정체를 숨긴 채 혜경이 일하고 있는 단란주점에 영업상무로 들어간다.

혜경은 겉으로 보이엔 강해 보이지만 외로움이 가득한 여자다. 세상 풍파를 몸으로 이겨내왔지만, 아직도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순수한 내면를 가진 사람이기도 하다.

범인을 잡는다는 목표에 집중해왔던 재곤은 자기 감정의 정체도 모른 채 혜경에게 마음이 흔들린다. 그리고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는 준길을 기다리던 혜경은 자기 옆에 있어주는 재곤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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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 잠입한 형사가 범인의 애인과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은 새롭지 않다. 다소 진부해 보이는 소재는 영화적 스타일과 배우의 깊이 있는 연기와 만나 탄력을 얻었다. '무뢰한'은 오승욱 감독과 전도연, 김남길의 근사한 합작품이다.

영화가 표방하는 하드보일드 멜로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비정', '냉혹'이라는 뜻이 담긴 하드보일드와 감상적 요소가 지배하는 극을 뜻하는 멜로는 부정교합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캐릭터가 스타일을 창조할 만큼 압도적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무뢰한'은 두 남녀의 사랑이야기인 동시에 밑바닥 사람들의 삶을 그린 영화다. 카메라가 쓰러져가는 아파트, 허름한 뒷골목을 거듭 비추는 건 그 공간이 그들이 직면한 현재이기 때문이다.

오승욱 감독은 "거칠고 투박한 세상에서 남녀 주인공이 종이장처럼 얇은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생각하는 영화"라고 작품을 정의했다. 

삶을 목적으로 사는 남자와 삶이 나락으로 떨어진 여자는 하나의 목표에만 집착하거나, 하나의 절박한 감정에 집중한다. 비슷하면서 다른 두 사람은 서로의 삶에 스며든다. 하지만 이들은 서로를 느끼면서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혜경을 관찰하는 재곤의 시선에서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감정이 읽힌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갖은 방법도 동원하던 그는 사랑을 하면서도 끝내 마음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저 맴돌기만 하는 무뢰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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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승욱 감독은 화려한 미술이나 기교 넘치는 편집을 배재했다. 의도된 유머도 거의 없다. 이는 전반적인 연출이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뢰한'은 내러티브가 탄탄한 영화는 아니다. 어디서 본듯한 익숙한 스토리가 불친절한 전개로 이어지는 탓에 모호하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다행인 것은 '무뢰한'이 배우들의 영화라는 것이다. 불분명한 인물의 감정은 전도연, 김남길이라는 배우에 의해 입체적으로 살아났으며 이는 보는 이의 마음에 끝내 파동을 일으킨다. 

전도연은 '좋은 배우'라는 표현만으로 부족하다. 돈에 치이고 사랑에 속아 비극의 구렁텅이에 빠진 김혜경의 삶을 정제된 연기로 표현해냈다. 김혜경의 삶을 보며 가슴이 아리다면 그것은 전도연의 힘이다.

빌린 옷과 가방으로 예쁘게 치장했다고 해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김혜경의 걸음걸이엔 삶의 버거움이, 환한 미소 너머엔 외로움이 서려 있다.

전도연은 창백한 얼굴, 깊게 패인 눈, 선명한 팔자 주름으로 인물이 지나온 고단한 삶의 기록을 표현해냈다. 그리고 셀 수 없는 다채로운 표정으로 김혜경의 불안한 심리 상태를 그려낸다. 여배우의 아름다움이란 인물의 삶을 오롯이 흡수할 때 발산된다는 것은 전도연은 몸소 보여준다.  

영화 말미 읊조리는 "상처 위에 상처, 더러운 기억 위에 더러운 기억을 얹고서 사는 거지"라는 문어체 대사는 한 여성의 기구한 삶을 함축한다. 

김남길도 기대 이상의 호연이다. '나쁜 새끼'인 동시에 '무력한 남자'의 내·외면을 세밀하게 연기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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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가지, 이 영화가 오승욱 감독의 15년 만의 귀환작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2000년 영화 '킬리만자로'를 통해 하드보일드 느와르의 새 장을 열었다. 시대를 앞서간 수작이었지만 관객의 지지를 얻지 못한 탓에 두 번째 기회는 빨리 오지 않았다.

감독에 따르면 '무뢰한'은 방 구석에 장전된 채로 표류하던 시나리오였다. 빛을 보지 못할 뻔 했던 이야기는 사나이 픽처스의 한재덕 대표에 의해 영화로 태어날 수 있었다. '부당거래', '범죄와의 전쟁:나쁜놈들 전성시대', '베를린', '신세계' 등 남자 영화를 만드는 데 일가견을 보여온 그는 '무뢰한'을 통해 남자는 물론 여자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는 멜로까지 제작 영역을 확장했다.

'무뢰한'은 13일 개막한 제68회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공식 초청돼 해외 영화 관계자들에게 선을 보인다. 그러나 그보다 더 궁금한 건 무뢰한들의 무례한 사랑을 받아들일 국내 관객의 반응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상영시간 118분, 5월 27일 개봉. 

(SBS 통합온라인뉴스센터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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