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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무조건 이기게 해줘라"…너무 쉬웠던 '태권도 승부조작'

관행과 고질병을 넘을 수 있을까?

-'국기(國技)'로 불리는 태권도, 여러 모로 위태롭다. 또 승부조작이다. 겨루기에 이어 이번엔 품새다.

사건은 2013년 7월 8일 경기도 의정부에서 열린 '제4회 전국 추계 한마음태권도 선수권대회'에서 벌어졌다. 이 대회는 대한장애인태권도협회 주관이다. 장애인 비장애인이 함께 하자는 취지에서 비장애인도 출전하는데 경기는 따로 진행한다. 품새 고등부 단체전에 8개 팀이 출전했다. 3번만 이기면 우승이었다. 어쨌든 전국 대회이기 때문에 우승하면 태권도 특기생으로 대학에 갈 수도 있다. 이외에도 여러 대회가 있긴 하지만 출전한 당사자들에겐 절실할 수 있겠다.

이 대회에서 품새 경기는 두 팀이 '고려'와 '금강' 품새를 각각 펼치고 심판 5명이 깃발을 들어 판정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청팀이 잘했다고 보면 청기를 홍팀이 잘했다면 홍기를 든다.

-협회 겨루기 담당 심판부의장인 김모씨는, 품새 담당 심판부의장인 전모씨에게 4강전에 앞서 모종의 지시를 했고 전씨는 다시 4강 경기 담당 심판 5명에게 이 내용을 전달했다. 경기 바로 직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경기가 시작됐다.

의정부에 있는 00고 팀이 먼저 했다.(청팀) 실수 없이 무난하게 품새를 마쳤다. 이어 서울 **고 팀이 나섰다.(홍팀) 고려 품새는 그럭저럭 마쳤으나 금강 품새에서 실수가 나왔다. 금강 품새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학다리서기에서 한 선수가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승부가 갈린 것으로 보였다. 판정을 기다리는 청팀에게선 승자의 여유마저 느껴졌다.
심영구 취재파일용
그런데 심판 5명이 모두 붉은 깃발을 들었다. 5:0, 전원 일치 판정으로 청팀이 졌다. 청팀 선수들은 한숨을 쉬며 천장을 올려다봤고 코치가 뛰어나와 항의했다.

"**고는 XX도 못하고 ##도 그랬는데 아니 어떻게 저팀이 이겨요!"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이렇게 결승에 진출한 **고 팀은, 같은 학교 2학년생으로 구성된 팀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이 팀은 전원 3학년생이었다.)

-경기 직전 심판부의장들이 전달한 내용은 이러했다.

"서울 **고 팀이 무조건 이기도록 판정하세요." 

심판 5명은 이 지시를 거부할 수 없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심판 이모씨는 "시합 후 상대팀 코치가 강력하게 항의했는데... 3:2 점수로 **고 팀이 이겼다면 우길 수도 있었겠지만 5:0 결과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서모씨는 "지시받은 사실을 잠시 잊고 청기를 들려고 했는데 다른 심판이 모두 홍기를 드는 걸 보고 나도 홍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5명 모두 승부조작 혐의를 시인했다.

심판부의장 김씨는 "서울 **고 팀에 나와 친한 서울시 태권도협회 간부 아들이 있는 걸 보고 이기게 해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스스로 판단해 조작을 지시한 것이지 그 간부와 사전 공모하거나 금품을 받은 건 아니라고도 주장했다. 전씨는 김씨가 시켜서 했다고 말했다.

이 대회 자체는 무수히 많은 대회 가운데 하나였다. 고등부 품새 단체전에 출전한 팀은 8곳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전국 대회로 인정되기 때문에 어쨌든 전국 대회 우승이다. 승부조작을 통해 우승한 **고 팀 4명은 전원 태권도 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이중 2명은 다른 대회 우승 전력도 있었지만 2명에게는 이 대회 우승이 유일했다.

-대회가 열린 게 2013년 7월인데 불과 두 달 전 태권도계엔 큰 사건이 벌어졌다.

2013년 5월 13일 서울시 태권도 대표 선발경기에서 심판이 앞서고 있는 선수에게 무더기로 경고를 주면서 결국 이 선수가 반칙패했다. 더 큰 사건은 그 다음이었다. 현직 태권도 관장이었던 피해 선수 아버지는 편파 판정에 항의하다 보름 만에 목숨을 끊었다. 파문이 갈수록 확산됐다. 서울시 태권도협회가 진상 조사에 나섰지만 그 경기 심판을 제명하는 선에서 사건은 마무리됐다.

경찰이 나선 뒤에야 조직적인 승부조작이 확인됐다. 대학 태권도학과 교수인 선수 아버지가 청탁했고 같은 대학 출신인 협회 임원이 승부조작을 지시했던 것이다. 기술심의회 의장, 심판위원장 등을 거쳐 심판에게 지시가 전달됐고 그대로 진행됐다. 아들이 대학을 가야하는데 입상 경력이 없다며 도와달라는 취지로 부탁했다는 것이다.

경찰은 당시 협회 임원과 심판, 선수 아버지 등 8명을 입건했다. 이중에 1명은 이번 품새 승부조작에 개입했던 심판부의장이기도 했다. 2013년 5월 승부조작 파문이 자살로 이어지며 사태가 확산되는 와중에 두 달 만에 또다시 승부조작을 지시한 것이다. 당시 피해 선수 아버지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면서 경찰이 수사에 나섰기에 그나마 이 두 시합의 승부조작이라도 밝혀낼 수 있었다.

-'승부조작'이라고 하면 대단히 거창해보인다.

뭔가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 밀실에서 은밀히 접선해 계획을 짜 역할을 나눠 맡아야할 것 같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했다. 거액의 돈이나 향응이 오가지도 않는다. 그저 필요하다면 심판에게 지시하거나 지시하게 하면 그만이다. 태권도계 안팎에서 승부조작을, 관행 또는 고질병이라고 부르는 게 그래서다. 태권도 선수 출신이자 태권도 관련 일에 종사하다 가끔 대회 때 심판을 하곤 하는 이들은 이런 태권도계 선배들, 윗사람의 지시를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

태권도는 지난해 2월엔 올림픽에서 퇴출될 위기를 간신히 넘겼다. 당시에도 판정 시비가 주된 문제였다. 올림픽 무대에서마저 판정 문제로 물러날 뻔하다 겨우 잔류할 수 있었다. 올림픽이 문제가 아니라, 종주국으로 자처하면서도 국내에선 그 뒤로도 편파 판정, 승부 조작 문제가 계속돼 온 것이었다.

누가 불러온 태권도의 위기였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문체부는 개선대책을 발표했다. 태권도협회는 자정노력을 하겠노라고 다짐했다. 한국은 태권도 종주국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이 관행과 고질병을 바꾸고 치유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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