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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나는 왜 아파트 경비원을 구하지 못 했나?

[취재파일] 나는 왜 아파트 경비원을 구하지 못 했나?
3년 여 전으로 기억한다.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을 무렵이다. 성형 한류의 문제점을 쫓아 압구정동을 취재하고 있었다. 미이라처럼 붕대를 두른 채 호텔방을 전전하는 중국인들, 그들을 입원시킬 병실조차 마련해 두지 않고 양악수술을 권하는 호객 전문 성형외과 직원의 목소리를 담았다. 마지막으로 휘황찬란한 거리의 부감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VJ와 촬영 포인트를 찾고 있었다.

그 때 눈에 띈 게 동호대교 옆에 우뚝 솟은 압구정 현대 아파트...81동으로 기억한다. 저 옥상 위에만 올라가면 아주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았다. 대개 아파트 옥상은 열쇠로 굳게 잠겨 있다. 더구나 낯선 사람이 출입하려면 반드시 관리사무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내키지 않은 듯 보였지만 관리 책임자는 촬영을 허락했고 경비원 한 분이 우리를 안내했다. 기대했던대로 초록색 방수 페인트가 칠해 진 옥상에서는 압구정 거리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VJ가 촬영을 시작한 걸 확인하고는 한발 치 물러나 경비원과 얘기를 나눴다.

"이 아파트는 많이 낡았지만 그래도 집값이 만만치 않지요?" "에이, 다 아시면서...여기가 대한민국 최고 부자들이 사는데 아니예요." 특별히 나눌 만한 대화가 없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때 초로의 경비원이 말문을 열었다. "이런 거는 취재 안 하세요?" 무슨 제보 거리가 있는 듯 보였다.

"이 동네 경비원들 몸이 성한 사람이 없어요. 보다시피 주차 공간은 없고 주민들이 차를 겹겹이 세워 놓으면 그거 정리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예요." 실제로 현대 아파트는 지은 지 오래돼 지하 주차장이 없다. 당연히 지상 공간은 그야말로 주차 지옥이었다.

고급 외제차들이 틈이 보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겨울이 더 문제라고 한다. 눈이 내려 땅이 얼면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어놓고 주차한 차를 미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는 하소연이 이어졌다.

"요철 있잖아요? 과속하지 말라고 볼록하게 세워놓은 거요. 땅이 미끄러우면 아무리 차를 밀어도 그 요철을 넘을 수가 없어요. 이거 보세요, 저도 허리에 파스 붙이고 있죠. 여기 경비 서는 노인네들 허리 멀쩡한 사람이 없어요." 그 고된 일을 왜 직접 하는 지 물었다.

"안 그러면 차 주인들이 난리를 쳐요. 자기 차를 가로막고 주차가 돼 있는데, 왜 그걸 못 막았냐고 막 다그쳐요. 이렇게 주차 공간이 없으면 서로 양보하고 사는 거지, 정말 너무 이기적인 사람이 많아요. 우리가 뭐 하인인가요. 막말하고 욕하고 그런 사람도 있어요." 그 사이에 부감 촬영이 끝났다.

옥상에서 내려온 뒤 주변 상황을 좀 더 살펴보기로 했다.순찰 돌던 다른 경비원 몇몇에게 다가가 물었다. 진짜 욕하고 윽박지르는 주민들이 있는지 궁금했다.

"물론 좋은 분들도 많이 계시죠. 그렇지만 너무 심한 사람도 있어요. 어제는 저 앞 동에 외제차 모는 사람이 우리가 아버지뻘인데 막 욕을 하더라고요. 주차 관리 잘 못 한다고. 그럴 때는 정말 낯 뜨겁고, 화가 치밀기도 하고..." 옆에 있는 경비원이 거들었다.

"기자 분이신가? 그러면 밤에 몰래카메라 갖고 와서 몇시간만 지켜 보세요. 주차가 얼마나 개판인지, 우리한테 막 욕하는 주민이 누군지, 다 찍을 수 있을 거예요." 주민들이 주차 문제를 놓고 왜 경비원을 타박하는지, 무슨 이유가 있는지 자세히 물었다.

그 대목에서 경비원들의 목소리가 다소 사그라들었다. 꼬치꼬치 캐물었더니 몇몇 경비원들이 주민들의 주차를 대행해 주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가뜩이나 주차가 힘든 아파트에서 경비원에게 돈 몇만 원 쥐어주고 자동차 키를 맡기는 부류들이 있다는 것이다.

마치 발레 파킹을 하는 레스토랑처럼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제 때 차를 뺄 수 없게 되거나 주차 시비가 생기면 경비원에게 책임을 묻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경비원 분신_640
나중에 인근 아파트에 사는 선배에게 들은 얘기인데, 부잣집 주인들이 경비원들을 인간적으로 무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특히 오래되고 낡은 아파트는 그만큼 편의시설이 부족하고, 늘어난 차량 때문에 비좁게 살다보니 자잘한 갈등이 많이 생긴다고 한다.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힘없고 빽없고 나이든 경비원은 동네북이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압구정동 경비원은 쉽게 넘볼 자리가 아니라고 한다. 집주인들이 부자인 만큼 때가 되면 생기는 것도 적지 않다고 한다.

대리 주차를 해 주는 조건으로 십만 원짜리 수표 한두장 건네 받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걸로 보였다. 눈길에 차를 밀다가 허리를 다치는 일이 생겨도 쥐꼬리 만한 월급 외로 생기는 부스러기 수입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아무리 세상살이에 차별이 없을 수는 없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최근 화두에 오른 '갑과 을'의 문화도 아니고, 경비원은 우리의 재산과 안전을 지켜주는 고마운 사람들 아닌가? 그들이 비록 가난하고 노약하여도 노비처럼 부려 먹고 인간적으로 무시할 수 있는 대상은 아니다.

우리에게 그럴 권리는 없다. 나는 취재 수첩에 들은 내용들을 꼼꼼히 메모했고, '성형 왕국의 그늘' 제작이 끝나면 우리 시대 경비원의 비애를 취재해 볼 작정이었다.

그러나 바쁜 일상 속에 '경비원의 비애'는 결국 수첩 속에 묻히고 말았다. 경비원의 애환은 표면적으로 더 굵직한 사건에 밀려 내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해가 바뀌고 탐사보도팀에서 경제부로 자리를 옮긴 뒤 한참 지나서 압구정동 경비원 분신 사건을 접했다. 미안하고 부끄럽고 아쉬웠다.

불꽃취재, 직언직설로 경비원 문제를 보도했다면 먹다 남은 음식을 던지는 미개한 만행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연유로 나는 경비원 분신사건을 눈여겨 보고 있다. 그러나 그 경비원이 극단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알렸음에도 별로 달라지는 건 없는 것 같다.

입주자 대표회의는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고, 전신 화상을 입은 경비원의 가족은 피부 이식 수술 등 수억원대 치료비를 감당하지 못해 집까지 내놓았다는 소식이 들린다. 나는 왜 압구정 아파트 경비원을 구하지 못했나? 기사로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초심을 되새겨 본다.

▶ "떡 던진 이유는…" '경비원 분신' 입주민 가족 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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