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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에볼라와의 싸움

[월드리포트] 에볼라와의 싸움
9월 18일 워싱턴의 국무부 청사에서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 당찬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미국은 이미 2개의 '싸움'에 뛰어든 때였다. 적 둘 가운데 하나는 이라크-시리아의 무장정파 IS, 다른 하나는 에볼라였다.
 
김 실장은 "미측에서는 ISIS(*IS의 별칭) 문제와 에볼라 퇴치 문제 등에서 관심을 촉구했고 저희와 견해를 같이 했다"고 전했다.
 
미국은 한국에 뭘 원하고 있을까? IS도 IS였지만 에볼라가 솔깃했다. "관심을 촉구했고 견해를 같이했다"면 당연히 군 병력이나 의료진 파견을 놓고 의견을 교환했을 터였다. 질문을 던졌다.
 
"에볼라와 싸우는데 미국이 3천 명의 병력을 파견하기로 했는데, 이 분야에서 협력할 여지가 있습니까?"
 
"주로 의료 인력으로 보고 있는데, 아직 한국 차원에서 어떤 걸 지원할 것이냐는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합니다."
 
"지원 의사는 있는 겁니까?"
 
"네, 이것은 귀국 후에 검토할 예정입니다."
 
김 실장은 검정색 승용차를 타고 총총 사라졌고 그 검토에 거의 한 달이 걸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아셈(ASEM) 정상회의에서 "에볼라 바이러스 대응을 위해 보건 인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미국이 주도하고 있는 에볼라와의 싸움에 돈 뿐 아니라 사람을 보내 동참하기로 선언한 것이다.
 
비극의 땅 서아프리카에서 감염자가 1만 명, 사망자가 5천 명에 육박할 정도로 에볼라는 무서운 바이러스다. 미국에서 3번째 환자가 나오자 국민들도 떨기 시작했다. 언론들은 '공포'라는 전염병이 퍼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첫 에볼라 발병이 확인됐을 때 '통제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던 프리든 질병통제센터(CDC) 소장은 의회 청문회에 불려나가 호된 추궁을 당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정치 감각과 통합 조정 능력을 고려해 부통령 비서실장 출신의 론 클레인을 '에볼라 차르'로 임명했다.
 
박 대통령의 보건인력 파견 선언으로 에볼라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다. 군이든 민이든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누군가를 뽑거나 자원을 받아서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 에볼라와의 싸움이다.
 
전 인류적 재앙 앞에서 네일 내일을 따질 계제는 아니라고 본다. 지금 막지 않으면 두 달 뒤면 매주 1만 명씩 감염자가 나올 수 있다는 세계보건기구(WHO)의 경고는 섬뜩하다.
 
오바마 대통령의 말대로 "라이베리아, 시에라리온, 기니 국민들이 에볼라와 싸우는 것을 돕는 것이 결국 우리 자신의 공중 보건에 대한 투자"인 셈이다.
 
사실 재정 지원과 달리 사람을 보내는 일은 예민한 문제다. 앞서 워싱턴을 방문한 정부 고위 당국자도 지원 문제를 묻자 "에볼라는 나름 민감한 부분이 있다"며 고민의 일단을 드러낸 바 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잠복해 있던 에볼라 문제는 뜻하지 않게 미 국무부 브리핑을 통해 도져 나왔다. 케리 국무장관이 지원을 호소했는데 큰 변화가 있느냐, 국제 사회의 반응에 만족하느냐는 질문을 취재진 누군가가 던졌다.
 
젠 사키 대변인은 잘 되고 있다고 장황히 답하면서 케리 장관이 여러 나라 당국자들과 전화통화한 사실, 특히 한국과 일본을 꼬집어 거론했다.
 
대변인이 공개적으로 이 정도 말할 정도면 논의가 상당히 진행된 게 틀림없었다. 10월 13일 케리 장관이 윤병세 외교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에볼라 대응 인력 파견 등 포괄적 지원 확대를 요청한 사실을 확인했다.
 
그 다음 서울에서 일어난 일들은 실망 수준이었다. 외교부 당국자는 실무 부서들이 아직 협의 중이라고 설명한 모양이다. 정례 브리핑에서는 "보건 인력 파견 관련해서 결정된 바 없다"는 답이 나왔다.
 
이런저런 변명들은 24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거짓말로 들통났다. 이구동성 정해진 바 없다던 보건 인력 파견을 박 대통령이 외국 정상들 앞에서 선언한 것이다. 청와대는 동행 취재진에게 슬그머니 자료를 돌린 모양이다. 대통령의 연설문이 작성된 시점은 언제인가? 정부가 보건 인력 파견 결정을 내린 시점은 그보다 앞설 것이 아닌가?
 
국가의 주요 대외 정책을 국가 원수가 국제무대에서 발표하는 효과를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 채널을 통해 단서가 드러났다면 국민들에게 정확히 설명하는 게 정부의 도리가 아닐까? 그런 일이 없었더라도 국민들에게 소상히 밝히고 이해를 구하는 절차가 선행됐어야 한다고 본다.
 
국민의 알 권리에 공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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