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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경계선 위의 두 미녀(美女,迷女)

[월드리포트] 경계선 위의 두 미녀(美女,迷女)
경계선 위에 위태롭게 선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행한 영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경계인(境界人)이라고 부릅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질적인 사회를 오가다 어느새 자신의 존재와 뿌리마저 잃게 되는 그런 삶이 경계인의 운명입니다. 

그제 일본에서 부고가 하나 들려왔습니다. 왕년의 스타 가수이자 정치인이었던 야마구치 요시코(山口淑子)가 94세를 일기로 지난 7일 도쿄 집에서 숨을 거둔 겁니다. '동양의 꽃'으로 불리던 야마구치 요시코에겐 또 하나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리샹란(李香蘭)! 그렇습니다. 그녀는 한때 중국인이었습니다.

리샹란
일제가 중국 대륙을 동북쪽부터 야금야금 장악해갈 무렵인 1920년 그녀는 만주에서 일본인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 13살 때 아버지의 친구였던 중국인 가정에 입양된 요시코는 리샹란이란 중국 이름으로 개명하며 중국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국적인 외모의 그녀는 일어와 중국어는 물론 러시아어까지 능통했고 당시 만주에 머물던 이탈리아 성악가를 사사해 일찌감치 소프라노의 자질을 뽐냈습니다. 그러던 차에 영화제작자의 눈에 들어 '지나의 밤' 등 일본이 중국인을 겨냥해 제작한 선전영화에 잇따라 출연하며 스타 배우이자 인기 가수로 중국은 물론 일본과 동아시아권에 이름을 날립니다.

리샹란
그녀가 주로 맡은 역할은 일본 남성을 사랑하다 못해 일본인으로 전향하는 중국 여인이었는데 반일 감정이 높았던 중국인들에게는 천하의 매국노로 손가락질 받기에 충분했습니다. 일본인임을 밝히지 못하고 중국인 행세를 해야만 했던 그 시절, 그녀에게도 적잖은 심적 고통이 있었을 겁니다. 전성기였던 1944년 상하이에서 녹음한 노래가 바로 불후의 명곡인 ‘야래향(夜來香)’입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리샹란은 한간(漢奸,매국노)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그녀의 일본인 부모가 출생증명서를 보내 일본인임을 입증하여 간신히 추방 형식으로 일본에 돌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리샹란
본명인 야마구치 요시코로 돌아간 그녀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며 재기에 성공합니다. 외교관과 결혼하며 잠시 은퇴했던 그녀는 TV 토크쇼 진행자로 복귀한 뒤 당시 다나카 수상의 추천으로 정계에 진출해 1974년부터 1992년까지 자민당 참의원을 지냈습니다. 마음 속에 항상 두 개의 조국을 품고 살았다는 그녀는 1987년 펴낸 자서전에서 과거 자신의 선전영화 출연을 뼈저리게 반성했습니다. 중국인들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였는지 태평양전쟁 피해자와 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죄와 배상을 촉구하는 사회단체를 이끌었습니다. 2005년에는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를 앞장 서 반대하기도 했습니다.

한동안 리샹란의 노래를 금지했던 중국 정부도 그녀의 부음에 즈음해 애도와 함께 예술적 성취를 통해 중일 우호에 큰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내리며 구원(久怨)을 풀었습니다.

리샹란과 어딘가 모르게 겹쳐지는 삶의 궤적을 보여줬던 우리의 보배로운 여성 예술인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 근대무용의 선구자이자 천재 무용가였던 최승희입니다.

최승희
1911년 서울에서 태어난 최승희는 어릴때부터 예술적인 기질이 남달랐습니다. 숙명여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본 무용계의 거장 이시이 바쿠의 문하로 들어가 모던댄스와 우리 고전 무용을 익힙니다. 일본을 무대로 이름을 얻기 시작해 세계 무대로 진출한 그녀는 1939년 파리 국립극장에서 피카소와 마티즈, 로망 롤랑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앞에 두고 인상 깊은 공연을 펼쳐 ‘동양 최고의 무희’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그녀는 최승희가 아닌 사이쇼키로 불렸고 일본 정관계나 경제계 명사들이 그녀의 공연을 보려고 줄을 섰습니다. 아마도 한류스타의 원조일 듯 싶습니다.

최승희
하지만 이때부터 그녀의 삶에 굴곡이 지기 시작했습니다. 대동아공영권을 외치던 일본의 압박으로 최승희는 만주와 중국 일대로 이른바 ‘황군위문공연’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때 행적 때문에 광복 후 친일파라는 오명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상해에서 일본군 위문 공연을 하던 중 일제 패망 소식을 들은 최승희는 북경을 거쳐 서울로 귀국한 뒤 얼마 뒤 남편과 함께 월북을 감행합니다. 북에서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설립해 창작 무용에 심취하며 활발하게 활동했던 그녀는 1958년 남편이 종파투쟁 과정에서 숙청당한 뒤로 내리막길을 걷다 자신도 숙청되는 아픔까지 겪고서야 1969년 쓸쓸히 세상을 떠납니다.

세계적인 무용가였지만 친일, 친북 행적에 대한 논란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최승희는 1988년 월북 예술가들에 대한 해금조치 이후 월북무용가라는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됐습니다. 북에서도 2003년 애국열사능원에 안장되면서 복권됐습니다. 하지만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그녀에 대한 연구와 기념사업이 한창이던 2009년,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이 오르면서 그녀의 예술적 업적에 대한 재조명 작업은 중단됐습니다. 좀처럼 이념이나 과거사 논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최승희의 파란만장한 삶에 대한 평가는 아직 미완으로 남아 있습니다.

리샹란과 최승희, 자신의 시대를 아름답게 빛냈던 두 미녀(美女)는 시대의 폭력 앞에서 영원한 경계인으로 전락해 길 잃고 갈팡질팡하던 미녀(迷女)들이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종군위안부 피해자들부터 이산가족들까지 그 시대 수많은 여성들이 일본제국주의의 야욕에 의해, 좌우 이데올로기 대결에 여념이 없던 남북 정권에 의해 희생당한 또 다른 가엾은 미녀들이었습니다. 그녀들의 고단했던 삶에 고개를 숙이며 지난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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