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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광복 후 69년 만의 '첫 단추'

서울시 주관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위한 전시회 의미

[취재파일] 광복 후 69년 만의 '첫 단추'
● 낮은 목소리로 시작된 외침…무관심과 외면

강덕경 할머니를 기억하십니까. 독립영화 ‘낮은 목소리’를 통해 세상에 나온 한 할머니입니다. 더 정확히 1992년 처음 열린 ‘수요 집회’에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낸 분입니다.

강덕경 할머니는 일본군 위안부였습니다. 평생 치욕스럽고 고통스러운 과거를 숨기고 살다가 1992년 수요 집회에 참여하면서 “내가 위안부였다”라고 세상을 향해 외쳤습니다. 일본의 사과와 배상을 받기 위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용기 있게 세상에 나왔지만 3년 후인 1995년 폐암 말기라는 사실을 알고 죽기 직전 세상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낮은 목소리’라는 영화를 통해 자신의 마지막 모습을 남겼습니다.

영화는 위안부의 실상을 직접적으로 고발하지는 않았습니다. 시골에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일상을 건조하게 담았습니다. 그림을 그리며 과거의 아픔을 달래는 모습과 호박을 심으며 희망을 이야기하는 할머니들의 모습, 그리고 암이라는 고통에 힘겨워 하지만 그 보다 과거의 고통에 더 힘들어 하는 강덕경 할머니의 모습이 담담히 담겨 있었습니다. 이런 할머니들의 모습은 쓰라린 과거의 아픔, 잔혹한 역사의 흔적을 지우려고 하는 안타까운 몸부림이었습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존재는 이렇게 조금씩 세상에 알려지게 됐습니다.

강덕경 할머니를 비롯한 할머니들은 수요일이면 거리로 나와 낮은 목소리로 세상에 외쳤습니다. 일본의 사과와 세상의 관심을, 그리고 전쟁의 폐해를, 평화를, 병든 몸으로 낮은 목소리지만 힘주어 세상에 외쳤습니다.

1992년부터 였습니다. 수요일마다 할머니들은 일본 대사관 앞에 자리를 잡고 일본의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들의 외침은 처음에는 공허했습니다. 국민들의 관심도 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의 지원은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재야인사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할머니들의 외로운 싸움은 계속됐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세상은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 69년 만의 결실…공공기관 주관의 첫 위안부 피해 할머니 행사

결실이 하나씩 맺어지고 있습니다. 그 결실의 하나로 공공기관 주관으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전시회가 처음으로 열렸습니다. 서울시가 나섰습니다. 서울시 지하 1층 시민청에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전시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아픔으로 날다’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회에서는 오는 24일까지 국내 여성작가들의 작품 20여 점이 전시됩니다.

매년 행사를 열기 위해 어려움을 겪었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함께 하고 있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미한 대표의 이야기입니다.

“공공기관이 행사를 주관해 주는 건 처음이에요. 첫 시작입니다. 그동안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행사를 하려면 돈을 마련해야 하고 조직해야 하고 쉽지 않았는데 이번에 저희는 지원만 했어요. 정말 힘이 납니다.”

서울시는 지난해 최초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한 조례를 제정했습니다. 조례를 통해 2008년부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지원해 주고 있는 생활보조금을 50만 원에서 70만 원으로 상향 조정하고, 사망시 조의금을 100만 원을 지급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담아 홍보할 수 있는 근거도 함께 마련했습니다. 이 조례를 근거로 예산도 편성했습니다. 그 결과 이번 전시회가 서울시청에서 열리게 됐습니다.

이번 전시회에 들어간 예산은 2천만 원입니다.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담아 주신 작가들에게 지급한 일종의 수고비가 거의 전부입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2천만 원의 예산을 사용하는데 반세기가 넘게 걸렸습니다. 곧 다가오는 광복절을 기준으로 하면 69년이 걸렸습니다. 할머니들이 거리로 처음 나온 1992년을 기준으로도 22년 만입니다. “이제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라도” 이렇게 변화된 모습은 다행입니다. 서울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위해 지원을 할 수 있는 토대가 조례 제정을 통해 마련된 만큼 앞으로 더 많은 활동이 있을 것으로 기대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을 것 같습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에 대한 지원은 중앙정부의 몫이지 지방자치단체인 서울시가 나설 일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서울시는 ‘사람 중심, 인권 중심’의 시정의 연장선이라고 설명했습니다. 다가오는 광복절과 세계 위안부 기림일을 맞아 서울 시민들과 함께 이 문제를 생각하고 평화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기 위해 기획된 전시회라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위안부 할머니들의 인권 및 명예회복, 역사 정의를 세우기 위한 노력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박원순 시장의 느낌이 묻어나는 정책이라는 평가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정파적인 논쟁과 누가 해야 하느냐는 논쟁은 불필요해 보입니다. 중앙정부가 외교적인 문제 등으로 소극적이라면 이런 문제에서 자유로운 지방자치단체가 나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비유를 하면 독도 문제에서 일본의 중앙정부는 뒷짐 지고 있고, 일본 지방자치단체인 시마네현이 다케시마의 날을 지정해 독도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진행형'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위한 전시회에서 김복동 할머니를 2년 만에 만났습니다. 지난 2011년 겨울, 1000회 수요 집회 현장에서 잠시 뵌 이후 오랜 만에 뵀습니다. 여전히 정정하시고 당차게 주장을 펼치시지만 세월의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더 여위신 것 같고 눈도 많이 안 좋아 보이셨습니다. 질문을 드렸던 저와 눈을 제대로 맞추시지 못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는 비록 눈은 잘 보이지 않으시지만 여전히 정신만은 또렷하셨습니다. 자신들의 아픔을 알아달라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달라는 칭얼거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전쟁과 평화를 언급하셨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의 이야기를 정리했습니다.

“먼저 일본의 공식적인 사과를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그리고 전쟁의 피해자는 힘없는 백성입니다. 잔혹한 전쟁이 가져온 나의 상처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전쟁이 없는 세상을 원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우리나라보다 더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다른 나라의 위안부 피해 여성들이 걱정입니다. 그들을 위해 모금활동을 하는 것이 내게 남은 마지막 과제입니다.”

서울시 지하 1층에 마련된 전시회에서는 한 작품이 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가 한 마리의 나비가 돼서 온화한 표정으로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 한 모습을 한 작품입니다. 할머니도 나비가 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나비가 돼서 훨훨 날아다니면서 전쟁의 아픔과 평화의 중요성을 알리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문제의 본질은 한 인간의 아픔에 국한돼 있지 않습니다. 잘못을 했으면 책임을 지고 사과를 해야 한다는 상식과 인류가 낳은 가장 큰 재앙이라는 전쟁의 실상이 담겨있는 이 시대의 하나의 상징입니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는 이야기입니다. 할머니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평화에 대한 낮은 목소리는 영원히 진행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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