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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의 한 수'

[취재파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신의 한 수'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미 알려졌듯이 미주 대륙 최초의 교황이자 예수회 출신 최초의 교황이면서 비유럽 출신으로는 거의 1300년 만에 나온 교황입니다. 비주류 아르헨티나 추기경이었던 그가 어떻게 ‘베드로의 후계자’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까요? 그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난 100년에 걸친 바티칸의 역사를 이해해야 합니다.

세계 1, 2차 대전을 겪으면서 교황청은 무력감을 느껴야 했습니다. 수 천만 명의 고귀한 생명이 죽어가는 상황에서 이렇다 할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습니다. 히틀러, 무솔리니 같은 희대의 독재자에 저항은커녕 거의 침묵으로 일관했습니다. 2차 대전이 일어난 1939년에 즉위한 비오 12세는 언변과 능력이 뛰어났지만 교회의 교도권을 강조하는 철저한 보수주의자였습니다. 과학 문명의 비약적 발전과 여권 신장, 신생 독립국 출현, 미소 냉전 체제 등 급변하는 세계정세에도 교황청은 변하지 않았고 변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1958년 비오 12세가 선종하자 새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열렸습니다. 무려 12번의 투표 끝에 78살의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가 후임자가 됐습니다. ‘착한 목자’, ‘가장 위대한 교황’으로 불리는 요한 23세였습니다. 당시 교황청의 권력을 잡고 있던 보수파들은 “고령이기 때문에 몇 년간 시간만 때우다 끝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하지만 요한 23세는 “숨이 막힐 것 같다. 새 공기가 필요하다”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소집했습니다. 보수파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1962년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세계에서 온 2500여명의 주교와 각 종교단체 대표들이 총출동한 가운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개막했습니다. 이 공의회의 기치는 이탈리아 말로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우리말로 번역하면 ‘적응과 쇄신’에 해당합니다. 공의회가 결정한 사항은 적응과 쇄신 수준이 아니라 혁명이었습니다. 16세기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4백 년 동안이나 라틴어로만 봉헌해온 미사를 각 나라 말로도 할 수 있게 됐습니다. 신부가 신자를 등지지 않고 마주보고 미사를 드리는 등 수많은 전례를 현대 사회 실정에 맞게 개혁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을 가톨릭 신자에서 사실상 전 인류로 확대하는 등 2,000년 교회사에 최대 변혁이었습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과 현 프란치스코 교황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아들’로 불릴 정도로 그 역사적 의미는 대단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캡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폐막된 지 13년 뒤인 1978년, 요한 23세에 버금가는 교황이 탄생했습니다. 폴란드의 카롤 보이티와 추기경, 우리가 잘 아는 요한 바오로 2세였습니다. 최초로 공산권 국가 출신 교황이었던 그는 어릴 때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눈으로 지켜봤습니다. 이 때문인지 요한 바오로 2세는 철저한 반공산주의자, 반전체주의자였습니다. 남미에 유행하던 해방 신학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고 낙태와 동성애에도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교리적으로 보수주의자였지만 그는 뛰어난 소통 능력과 대중성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축구, 스키 등 스포츠에 만능이었고 연극배우를 한 덕분에 TV 시대에 적합한 매너를 보유했습니다. 한국을 비롯해 사상 최다인 129개국을 순방하며 역대 교황 중 가장 높은 인기를 누렸습니다.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하자 그의 교리성 장관이었던 독일의 요셉 라칭거 추기경이 바통을 이어받았습니다. 바로 직전 교황인 베네딕토 16세였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라틴어 미사를 해도 된다”는 등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는 것 같은 경향을 나타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입지 않았던 하얀 모피로 만든 모제타(어깨 망토)를 걸쳤고 빨간 신발까지 신었습니다. 전통적인 교회 독트린에 충실했던 그는 마치 19세기의 권위적인 교황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요한 23세가 덕성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영성에서 뛰어났다면 베네딕토 16세는 당대 최고의 이론가라 불릴 만큼 지성이 뛰어났습니다. 10개 국어에도 능통했습니다. 해방신학의 대척점에 서며 정통 보수노선을 추구했지만 그에게는 카리스마가 없었고 건강도 좋지 않았습니다. 공교롭게도 그의 재임 시절에 사제의 각종 성추행설과 바티칸 은행의 마피아 연루설이 터져 나왔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점증되는 위기를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보이지 못했고 가톨릭에 대한 신뢰와 인기는 속수무책으로 추락했습니다. CNN의 바티칸 전문기자로 유명한 존 앨런에 따르면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자 교황청 원로들과 이탈리아 주류 언론들이 직간접적으로 교황직에서 물러나라는 신호를 보냈다고 합니다. 누구보다 교황 자리에 자부심을 느꼈던 베네딕토 16세는 지난해 2월 결국 598년 만에 중도에 사임하는 교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미증유의 위기에 놓인 가톨릭교회가 선택한 인물은 전임자와 정반대의 캐릭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개혁적이고 진보적이면서도 겸손하고 탈권위적인 사제, 교회 독트린보다 사회 정의에 더 관심이 많은 사제, 떠나갔던 신자를 다시 모이게 할 수 있는 인간적 매력을 갖춘 사제, 그가 바로 아르헨티나 추기경인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였습니다. 유럽 출신이 아닌데다 예수회 출신인 그를 ‘그리스도의 으뜸 일꾼’으로 결정한 것은 로마 가톨릭이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절박감에서 나온 일종의 자구책이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프란치스코 신드롬’이 말해 주듯 그야말로 '신의 한 수'가 됐다는 게 교황청은 물론 타 종교도 이구동성으로 인정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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