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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유병언 사건에 떠올린 셜록 홈즈

[취재파일] 유병언 사건에 떠올린 셜록 홈즈
The Norwood Builder, '노우드의 건축업자'는 코난 도일의 단편집 [셜록 홈즈의 귀환]에 수록된 소설이다.

재미난 사건이 없다며 여느때처럼 투덜대던 홈즈의 하숙집으로, 살인 누명을 쓴 의뢰인 청년이 찾아온다. 어머니의 지인에게 갑자기 유산을 상속받게 됐는데 그를 만나고 온 직후 이 지인인 건축업자는 살해됐고 청년은 범인으로 몰렸다는 거다. 조사에 착수한 홈즈는 좀처럼 청년의 누명을 벗겨줄 단서를 찾지 못한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 경찰에게는 청년이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단서가, 홈즈에게는 청년의 누명을 벗겨줄 역시 결정적인 단서가 나타나면서 사건의 실마리는 풀리고 홈즈는 '진범'을 찾아낸다.

출간 백 년이 넘은 만큼 스포일러는 아니라고 믿고 '트릭'에 대해 좀더 설명하면, 청년에게 살인 누명을 씌운 건, 살해당한 것으로 알려진 건축업자다. 이 건축업자는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자 차명으로 재산을 빼돌린 뒤 구원(舊怨)에 대한 복수를 궁리한다. 복수의 내용은 젊은 시절 자신의 구애를 거절했던 여인의 아들을 살인범으로 만든다는 것이었다. 청년에게 자기 재산을 물려주겠다는 유언장을 작성하고, 청년을 초대했다 돌려보낸 뒤, 청년이 자신을 살해하고 창고를 태워 흔적을 없앤 것처럼 상황을 조작한다. 범행 동기는 유산을 빨리 상속받기 위해서라는 것.
심영구 취재파일용

이에 앞서 이 건축업자는 전공을 활용해 집안에 밀실을 만든다. 2층 복도 끝을 활용해 마치 벽으로 막힌 듯 보이나 실은 작은 밀실이 있는데 여기에 은신해 있던 것. 너무나 감쪽 같이 만들어 아무도 찾지 못했다. 홈즈도 마찬가지였다. 결정적으로 탄로나게 된 건 건축업자의 욕심 때문. 청년이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단서를 만들어주고픈 욕심이 생긴 건축업자는 밀실에서 몰래 나와 유언장 작성시 확보해 놨던 청년의 엄지 지문에 피를 묻혀 사건 현장에 찍어놓은 것이다. 경찰은 이를 청년이 범인이라는 결정적인 단서로 보게 되나, 홈즈는 달랐다. 하루 전 홈즈가 현장 조사할 때는 없던 게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이를 수상하게 본 홈즈는 다시 집안을 샅샅이 뒤져 1층 복도와 2층 복도 길이가 다르다는 걸 알게 된다. 2층이 조금 더 짧았던 것이다. 결국 홈즈는 밀실에 숨어있던 건축업자를 찾아낸다. (위의 삽화는 홈즈가 거짓으로 불이 난 것처럼 연기를 피워 숨어있던 건축업자 스스로 뛰쳐나오게 만든 그 장면이다.)

이 단편이 새삼 떠오른 건 역시 유병언씨 때문이다.

검찰이 순천 별장을 급습했던 5월 25일, 당시 유씨가 별장의 비밀 공간에 숨어있었다는 걸 한 달이 지나 알게 됐다는 검찰 설명에 나는 이 소설을 연상했다. 얼마나 감쪽 같았기에 검찰이 한 차례 수색하고, 다음 날 경찰이 정밀 감식을 벌일 때까지도 몰랐을까.

심영구 리사이징_5
심영구 리사이징_5
심영구 리사이징_5


그런데 현장에 가서 봤을 땐 설명과 좀 달랐다고 한다. 별장 2층 양쪽에 밀실 두 곳이 있었는데 각각 그냥 벽으로 보이지 않았다. 갑자기 툭 튀어나와있는 두 곳에 밀실이 있었다. 잘 보면 안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통나무 틈새는 벌어져 있었다. 그저 벽처럼 보이게 했던 소설 속 건축업자의 솜씨와, 목수일을 좀 했다던 유씨 운전기사 양회정씨와는 차이가 있었나보다.

별장에서 체포한 구원파 신도 신모씨가, 한 달이나 지나 이런 얘기를 털어놓을 때까지 검찰은 밀실의 존재를 까맣게 몰랐다. 유씨 시신을 발견해놓고도 40일이 지나 유씨라는 걸 확인한 경찰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소설에서 늘 홈즈에게 무시당하는 런던 경시청의 레스트레이드 경감과 이건 흡사하다.

신씨 진술대로 검찰이 압수수색 들어왔던 5월 25일에 유씨가 밀실로 피신한 상태였다면 검찰은 그야말로 코앞에서 유씨를 놓친 것이다. 검찰이 압수수색을 마치고 신씨를 체포해갔던 5월 25일 23시 20분, 그리고 경찰이 검찰 의뢰를 받아 정밀 감식하러 왔던 5월 26일 15시, 유씨는 이 사이 15시간 정도의 여유 시간 동안에 별장을 빠져나간 것 같다.

심영구 취재파일용

경찰은 5월 26일 정밀 감식할 때 밀실을 발견하지 못한 데 대해 7월 25일 이런 해명을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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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6. 경찰은 유병언이 도피한 것으로 판단한 검찰 요청에 따라 유병언 발견을 위한 수색 목적이 아닌 증거물 확보목적으로 송치재 별장에 투입되었음
  ※ 검찰에서 송치재 별장의 거주자 신원확인을 위해 경찰에 지문채취 등 감식 요청

○당일 경찰 과학수사요원 5명은 송치재 별장 1층 주거지를 중심으로 현장감식을 실시하여 지문과 DNA를 채취하였음

○ 당시 경찰 과학수사요원 외 검찰 수사관들도 있었으며, 경찰 과학수사요원은 검찰로부터 의뢰받은 현장감식만 실시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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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언이 도피했다는 판단은 검찰이 했고 증거물 확보 목적에 따라 검찰로부터 의뢰받은 현장감식만 했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책임은 사건을 지휘한 검찰에 있지 검찰 요청에 따라 움직이기만 한 경찰엔 책임이 없다는 취지다.

유병언씨가 세월호 참사의 주범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면서 대대적인 검거 작전을 펴다가 시신을, 그것도 40일 늦게 확인하면서 검, 경 모두 망신만 톡톡히 당했다. 검찰에선 인천지검장이 사퇴했고 경찰은 전남지방경찰청장과 순천경찰서장이 경질됐다. 처음부터 삐걱거렸던 검경 수사 공조는 서로 망신당하는 데 크게 일조한 것 같다.

검찰과 경찰이 뭔가 음모를 꾸며서 거짓말을 하고 은폐하고 있다는 생각까지는 들지 않는다. 공권력을 그렇게까지 신뢰하지 못하면 이 사회는 지탱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검경이 적어도 이번 사태 관련해서는 지독히 무능했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다.

지금 이 시대에도 셜록 홈즈가 필요한 것일까. 셜록 홈즈는 어디까지나 민간 자문 탐정(Consulting Detective)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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