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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진의 SBS 전망대] "판자촌에서 18년 살다 간 정일우 신부는…"

대담 : 조현철 신부

▷ 한수진/사회자:
파란 눈의 신부로 유명한 빈민 운동의 대부 정일우 신부를 아시나요? 아일랜드계 미국인인 신부님은 판자촌에서 살면서 평생을 빈민들과 함께 해서 '판자촌의 예수'다, 이렇게 불린 분인데요. 이분이 그저께 하늘나라로 떠나셨습니다. 향년 79세 이었는데요. 한 줄기 빛과 같았던 이 분의 삶을 정일우 신부와 각별한 사이였던 조현철 신부님과 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신부님 나와 계십니까.

▶ 조현철 신부:
안녕하세요.

▷ 한수진/사회자:
신부님께서는 정일우 신부님 마지막으로 뵌 게 언제셨나요?

▶ 조현철 신부:
돌아가시는 당일 날 뵀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당일 날 그럼 임종을 지키셨던 건가요?

▶ 조현철 신부:
임종 직전에 제가 다른 일이 있어서 나왔는데요. 그 직전까지 제가 있었습니다.

▷ 한수진/사회자:
꽤 긴 시간 지병을 앓으시다가 이렇게 세상을 떠나신 거죠?

▶ 조현철 신부:
네, 한 10년 됩니다. 2004년 가을에 단식을, 매년 단식을 하셨는데 그 때 단식이 좀 길게 됐어요. 그래서 그 때 후유증으로 그 때부터 계속 좀 그렇게 아프셨던 거죠.

▷ 한수진/사회자:
아, 긴 단식의 후유증으로.

▶ 조현철 신부:
네, 한 2달 정도, 2004년에 2달 정도 단식을 하셨어요. 그렇게 어떻게 좀 길게 됐네요, 그 때.

▷ 한수진/사회자:
어떤 영적인 수련을 위해서 단식을 하셨던 모양이에요.

▶ 조현철 신부:
겸사겸사일 겁니다. 그 분이 매년 그렇게 하셨어요, 한 번씩. 짧게는 열흘, 길게는 20일.. 이렇게 하셨는데 그 때 길게 넘어갔어요.

▷ 한수진/사회자:
고 정일우 신부님과 조현철 신부님, 두 분은 각별한 사이였다고요?

▶ 조현철 신부:
저만 그런 건 아니고요. 여러 사람이 있는데 우선 같은 수도에 있으니까요, 예수회. 그래서 대선배님이시기도 하고 기본적으로 제가 입회할 때부터 정말 동경하고 좋아하는 그런 사이였고 그 다음에 제가 철학을 공부할 때 2년 동안 제 영적 지도신부 역할을 해주셨고요.
그 다음에 실습기 2년을 보내는데, 일을 하면서, 그 때 살았던 집의 원장 신부님으로 계셨고, 정일우 신부님이 그 때 시골로 막 내려가신지 몇 달 되었을 때에요. 저도 그 때 한 6개월 정도 마지막 따라가서 괴산에서 같이 살았죠. 그 때는 시골에서 딱 둘이 살았죠, 예수회원으로는.

▷ 한수진/사회자:
계산에서 같이 두 분만 같이 계시기도 했고 추억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 조현철 신부:
추억이 많죠. 특별히 기억나는 거라고 하면, 저의 지도 신부를 맡아주면서 면담을 하는데, 대게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만납니다. 첫 만남은 서로 알아야 하니까 긴데요. 그 때 신부님이 공덕동에 사셨는데, 거기 방이 토굴 같은 작은 방이 있어요.
거기서 신부님하고 6시간 넘게 이야기를 했던 것 같아요. 그 기억이 많이 나고, 그 다음에 괴산 시골에서 농부랑 같이 살 때, 그 때는 탄로가 많이 확립이 안 되어서요. 그 당시는 농산물을 많이 팔러 다녔어요. 청주나 인천 쪽에 아는 신부님이 주임신부로 있는 본당에 많이 갔죠. 그래서 대추나 수박 같은 것 싣고 가서 막걸리도 가지고 가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거기다 놓고 파는 거죠. 팔면서 약간 잔치 비슷하게 되는 그런 모습이었죠.

▷ 한수진/사회자:
어떤 물건들을 주로 파셨나요.

▶ 조현철 신부:
괴산에서는 그냥 농산물. 대추나 고추나 수박, 여름에 계절식품 그런 것들 많이 팔았죠.

▷ 한수진/사회자:
정일우 신부님 하면 그야말로 빈민운동의 대부로 불리셨던 분 아닙니까. 우리나라에 오신지도 오래되신 거죠?

▶ 조현철 신부:
오래되셨죠, 1960년에 처음 오셨습니다. 1960년 9월에.

▷ 한수진/사회자:
당시 신부님은 30대 초반이 되셨던 거고요.

▶ 조현철 신부:
신부님이 35년생이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되나요, 25살?

▷ 한수진/사회자:
일찍 오셨어요. 그래서 계속 이런 빈민들, 어려운 분들과 같이 하셨던 거예요.

▶ 조현철 신부:
60년에 와서 한국말도 좀 배우고, 그 때가 실습기로 오신 거예요. 63년에 다시 미국으로 가십니다. 돌아가셔서 3년 반 정도 신학을 공부하시고 66년에 사제가 되어서 다시 오셨죠. 처음에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 때 이미 예수회에서 서강대학교를 만들었기 때문에 서강대학교에서 신학, 철학, 영어 같은 것 가르치시고 예수회 안에서, 그 때 사람이 없던 초창기이니까 수련장도 아마 하시고 그랬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 한수진/사회자:
그러면 어떻게 해서 판자촌 빈민들과 함께 지내시게 되신 건가요.

▶ 조현철 신부:
그 때 아마 그게 1973년도인가 그럴 건데, 그 때 까지는 학교에서 주로 계셨단 말이에요. 예수회에서 수련장, 예수회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 키우면서. 그런데 이 분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느 날 보니까 내가, 복음이라고 하죠, 성서에 나오는 복음. 예수의 삶을 해놓은 복음, 그 복음의 삶을 내가 입으로만 사는 것 아닌가. 서강대라고 하는 보호막 안에서 세상과 떨어져서. 예수란 분은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았는데, 그런 의문이 들었다고 해요.
그러면서 서울 대도시에 판자촌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어요. 다른 동료 예수회 회원을 통해서. 그래가지고 판자촌에 한 달 간 살아보겠다, 이래서 당시 책임자 신부님한테 청을 하죠. 그래서 73년도 가을에 청계천 판자촌에 들어가고 거기서 이제 빈민들을 만나는데 그 때 목사님도 있었지만 특히 한 평생 같이했던 고 제정구 선생님. 그 분이 그 당시 거기서 야학을 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 분을 만나죠. 한 달 체험을 하려고 갔는데 그게 한 18년 된 거죠, 계속 못 떠나고 거기서 살게 된 거죠.

▷ 한수진/사회자:
정말 불편한 삶을 자청하셨어요. 그래서 보면 곳곳의 판자촌에서 같이 계시다가 빈민들과, 또 농촌으로 옮겨가서 공동체도 만드셨고 그래서 자립도 돕고 여러 가지 큰일들을 많이 하셨는데 그런데 또 몇 번이고 강제 추방될 뻔 한 그런 위기들도 있었다면서요?

▶ 조현철 신부:
아마, 삼선개헌 과정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많이 했잖아요. 학생들이 많이 잡혀가는 것을 보셨나 봐요. 그리고 언론에서 보도도 잘 안 하고, 이러니까 이 분이 언론 자유가 죽었다, 그러면서 독재다, 그런 걸 항의하기 위해서 혼자 1인 시위 비슷한 걸 하셨어요. 그러다 정보부에서도 나오고 그런 식으로.

▷ 한수진/사회자:
그런 유신 반대 운동도 함께 하셨고요.

▶ 조현철 신부:
자연히 그렇게 이어지겠죠, 삼선개헌부터 유신까지 갔으니까.

▷ 한수진/사회자:
그런 힘든 순간 다 겪으시면서 한국에 끝까지 남으셨던 그런 분이군요. 정말 어려운 이웃의 친구였고 참 한국을 사랑했던 분인 것 같아요. 지금도 하늘에서 환하게 웃고 계실 것 같은데 정일우 신부님은 어떤 분으로 기억 될까요?

▶ 조현철 신부:
정말 사람들에게는 환한 웃음, 천진난만한, 장난 잘 치시고 이렇게 겉으로는 드러나는데 좀 오래 친교를 가졌던 분들께는 아마, 저도 그렇고, 정말로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그 사람의 말을 잘 듣고, 그래서 아 이분이 지금 나와 함께 있구나, 라는 그런 느낌을 주는 분.
그리고 또 한평생 자기 자신도, 당신도 사람이 되고자 했던, 진짜 사람이죠.
또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이 함께 한 사람들도 정말 진짜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었던 분, 아마 그렇지 않을까..

▷ 한수진/사회자:
그야말로 예수님 같은 그런 분이셨군요. 많은 분들이 추모의 마음으로 함께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조현철 신부 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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