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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러시아군 철수 대가로 '크림' 줬나?…안갯속 우크라이나

[월드리포트] 러시아군 철수 대가로 '크림' 줬나?…안갯속 우크라이나
미국과 러시아 외교 수장이 일요일인 3월 30일 프랑스 파리에서 만났습니다. 우크라이나 사태 해결을 위한 긴급 회동이었습니다. 이틀 전,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오바마 미국 대통령에게 갑자기 전화를 걸어 성사된 회담입니다. 케리 미국 국무장관과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며 4시간 동안 긴 대화를 나눴습니다. 두 사람은 합의안을 마련하지 못했지만, 대화를 계속하기로 했습니다. 양국 대통령이 약속한대로 외교적으로 사태를 해결한다는 원칙을 지키기로 한 겁니다.

이번 회담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양측이 갖고 있는 패를 ‘솔직하게’ 꺼내 보였다는 겁니다. 먼저 미국의 카드입니다. 공개된 것만 보면 별 게 없어 보입니다. 케리 장관은 라브로프 장관에게 우크라이나에 조성된 긴장 완화를 시종일관 요구했습니다. 핵심 요구사항은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에 배치된 러시아군의 철수입니다. 미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국경지대에 3만~5만명 가량의 군인을 주둔시켰다고 추정했습니다.

이 때문에 우크라이나는 공포와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러시아는 통상적인 훈련일 뿐 우크라이나 국경을 침범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지만, 미국은 협상할 분위기부터 만들라고 요구했습니다. 미국은 국경에 배치된 러시아 군이 막판에 ‘베팅용’ 으로 사용될 가능성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케리 장관은 라브로프 장관에게 러시아군 철수와 관련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 덕분인지 회담 다음 날,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에 배치된 러시아군 일부가 철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짜 철수인지 상징적인 부대 이동인지 러시아의 진의는 아직 파악되지 않고 있습니다. 미국 국무부는 “철수 보도가 사실이라면 첫 번째 조치로 환영할 만 하다”고 논평했습니다.

미국의 태도에서 또 하나의 중대한 변화가 감지됐습니다. 바로 크림반도에 대한 입장 표명이 사라졌다는 겁니다. 이번 협상에서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은 이슈조차 되지 않은 듯 합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은 러시아의 합병 조치는 불법이며 받아 들일 수 없다고 수시로 강력히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케리 장관은 이번 회담에서 이 문제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크림반도 캡쳐_50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말로는 불법이라 지적했지만, 러시아로 들어간 크림을 우크라이나 땅으로 되돌릴 힘과 의지가 없다는 걸 인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미 지나간 역사로 받아들인 걸까요. 미국은 당장 급한 불인 러시아군의 위협에서 벗어나자는 말만 한 셈입니다. 외교 협상과 긴장 완화의 대가로 크림을 넘겨 주기로 결정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반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연방제’라는 목표를 제시했습니다. 미국이 러시아군의 철군을 통한 긴장 완화라는 현재 목표에 집중했다면,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미래라는 큰 그림을 그려보자고 요구했습니다. 라브로프 장관은 우크라이나는 이미 통일된 국가 기능을 할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서부, 동부, 남부 각 지역별로 정치적 전통과 이해관계가 다르니 각각의 이해관계를 조율하면서 한 나라를 유지하는 것은 연방제 밖에 없다는 논리를 폈습니다.

서방국가들이 우크라이나 영토를 분할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화답입니다. 미국과 러시아의 역할은 우크라이나의 모든 정파들이 모여 연방제 헌법을 만드는 협상에 나서도록 지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연방제만이 우크라이나의 안정성과 중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의 미래를 설계할 때 러시아가 가장 꺼리는 시나리오는 우크라이나가 서방의 군사동맹인 ‘나토’에 가입하는 겁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폴란드를 비롯한 옛 소련권 국가들이 이미 나토에 가입해 자국 안보에 큰 위협이 되고 있는데, 우크라이나마저 가입하면 최악의 상황으로 몰리는 겁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 국경이 나라 대 나라 경계선이 아닌, 유럽과의 최전선이 되는 걸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당초 우크라이나를 자국 관세동맹으로 끌어 들이려 했지만, 수도 키예프에 친 서방 정권이 들어서면서 실패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남은 목표는 적어도 우크라이나를 유럽과 러시아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지대로 남겨 놓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연방제라는 논리를 개발한 겁니다. 연방제를 실시하면 서쪽은 중앙정부를 중심으로 친 서방 정권이 들어서겠지만, 동쪽은 친 러시아계가 많으니 러시아의 정치, 경제적 영향력을 확대해 볼 수 있다는 계산입니다.

지역 정부의 자치권을 대폭 확대한 헌법을 만들고, 이후 선거를 통해 친 러시아계 인사로 구성된 지방정부를 만들어 놓으면 언제든 크림 반도와 비슷한 상황을 연출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우크라이나 동부 도시 하리코프와 도네츠크 등에서는 친 러시아계 주민들이 자치권 확대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습니다. 러시아의 의도에 딱 맞아 떨어지는 집회입니다.
    

미국의 대응논리는 다소 빈약해 보입니다. 케리 장관은 러시아의 연방제 제안에 대한 평가를 유보한 채 우크라이나의 헌법 개정과 정부 개편은 우크라이나 인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다만, 미국이 합법 정부로 인정한 중앙정부가 협상 테이블에 반드시 참가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에 대한 언급은 피한 채 모든 정치 세력이 참가해 논의하자고 주장했습니다.

협상 테이블이 열리면 우크라이나 중앙 정부도 여러 세력 중에 하나가 되는 셈입니다. 설령 우크라이나 중앙정부가 제동을 건다 해도 모든 정파가 모인 협상이라는 게 어떤 변수가 생길 지는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친 러시아계 정파들은 크림 반도에서 주민들이 투표로 러시아 귀속을 결정한 것처럼 자결권을 강력히 주장할 것입니다. ‘주민 스스로’라는 미국측 논리가 이때는 어떻게 작용할 지 궁금합니다.
    
우크라이나 사태 전반에 걸쳐 러시아가 먼저 공격하면, 미국을 비롯한 서방이 허겁지겁 방어할 수를 찾는 형국이 이번 외교 협상에서 또 반복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연방제’라는 러시아의 새로운 카드에 서방 국가들은 또 고민에 빠진 듯 합니다. 서방 언론들은 복잡하고 힘든 조건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는 말처럼 크림은 그렇게 러시아로 넘어갔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미래가 여전히 안갯속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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