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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원자력방호방재법' 통과 안 된 게 나라 망신?

[취재파일] '원자력방호방재법' 통과 안 된 게 나라 망신?
국회가 공식적으로 열리지 않는 3월은 국회의원에게는 방학 같은 기간입니다. 휴가를 가는 의원이 있는가 하면 해외출장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회가 평소보다 한산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게다가 지방선거 열기가 서서히 달아오르면서 정치부 기자들의 관심사도 국회 법안 처리보다는 선거 쪽으로 이동하고 있는 분위기입니다. 그런데 요 며칠 국회에서 이름도 생소한 원자력 관련 법 개정안이 쟁점이 되고 있습니다.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 여당 위원들이 이 법 개정안 때문에 우르르 몰려와 브리핑을 하는가 하면, 야당 원내수석부대표가 다음날 반박 기자회견을 하고 여당 대변인이 다시 반박을 하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여당은 이 법이 개정 안돼서 국가 위신이 떨어지고 망신을 당하게 생겼다고 하고, 야당은 언제 그렇게 중요한 법이라고 자신들에게 말이나 해줬냐는 게 주장의 요지입니다. 특히 네덜란드 헤이그에 핵안보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박근혜 대통령이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는 말이 나오면서 정치권이 더 격하게 맞서고 있습니다. 어떤 법 개정안이기에 이런 얘기가 나오는 것일까요? 

■ 원자력방호방재법, 어떤 법이야?

쟁점이 된 법안은 본명이 좀 깁니다. '원자력 시설 등의 방호 및 방사능 방재 대책법', 보통 줄여서 원자력방호방재법이라고 부릅니다. 지난 2011년 12월 29일, 국회는 본회의에서 '핵테러억제협약'과 '개정 핵물질방호 협약' 비준 동의안을 의결했습니다. 이 국제 협약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원자력방호방재법을 일부 수정해야한답니다. 핵 관련 범죄자 처벌 조항을 신설하고, 핵 범죄 행위를 핵물질을 탈취하는 것에서 핵시설 손상, 핵물질 유출까지 확대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합니다. 이런 내용을 국내법을 개정해 반영한 뒤에 핵테러억제협약은 유엔사무국에, 개정 핵물질방호협약은 국제원자력 기구에 비준서를 기탁하게 됩니다. 그러면 국제 협약이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 구조입니다.

원자력방호방재법 개정에는 여야 이견이 없습니다. 핵 관련 문제를 보다 엄격하게 관리하자는 취지이기 때문에 반대 의견 없이 통과될 수 있는 법 개정안입니다. 하지만 '불량상임위'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는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에서 처리하고 있는 법안이어서 진도가 나가지를 않고 있습니다. 2월 국회에서는 처리되기 직전까지 갔지만, 편성위원회 신설을 규정하는 방송법 개정안 때문에 여야가 싸우느라 소위에 상정돼 있는 법안 92개가 2월 국회가 끝나면서 같이 '살처분' 돼 버렸습니다.  원자력방호방재법도 92개 법안 가운데 하나여서 상임위 문턱을 못 넘고 다시 소위에 계류돼 있습니다. 국회가 열리면 소위부터 다시 절차를 거쳐서 올라가는 하는 상황입니다.

■ 따져볼 사안 1. 원자력방호방재법을 언제까지 처리하면 망신당하지 않는 것일까

필요한 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국민이 불편을 겪거나 고통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망신을 당하거나 체면이 깎이지는 않습니다. 원자력방호방재법 개정안을 두고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거는 지난 2012년 핵안보정상회의 개최국이 우리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그때 회의 주최국으로서 핵테러억제협약과 개정 핵물질방호협약 비준한다고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체면이 깎이고 창피하다는 주장입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두개의 협약 가운데, 핵테러억제협약은 이미 국제적으로 발효된 상태이지만, 개정 핵물질방호협약은 현재 발효된 상태가 아닙니다. 당사국이 99개국인데 2/3 이상 비준이 안 끝났기 때문입니다. 2012년 서울정상 선언문은 "2005년 개정 핵물질방호협약의 국내적인 승인 절차를 가속화할 것을 촉구하며, 이를 통해 동 개정 협약이 2014년까지 발효되기를 추구한다"고 돼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게 시점입니다. 협약이 올해 말까지 통과되도록 노력한다는 얘기입니다. 이번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도 정상들이 올해 말로 똑같은 목표 시한을 설정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물론 2월 국회에서 협약 비준이 효력을 발휘하도록 원자력방호방재법이 통과됐으면 금상첨화였겠지만, 올 연말까지 법안이 통과되더라도 우리나라는 서울핵안보정상회의 약속을 이행한 셈이 됩니다. 현재 기준으로 본다면 아직 9개월 넘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 따져볼 사안 2. 우리나라 말고 원자력 관련 협약을 비준하지 못한 나라는 어디인가

우리나라같이 핵테러억제협약과 개정 핵물질방호협약이 발효되지 않은 나라를 따져보는 것도 중요합니다. 대통령이 핵정상회의에 참석했을 때 우리나라만 못한 거라면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상당수가 아직 마치지 못한 거라면 얘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원안위와 외교부에 한참 전화를 돌리고 나서 협약이 발효되지 않은 나라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에 핵안보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53개국 가운데서 협약이 비준되지 않은 국가들의 실제 명단을 적어보겠습니다.

핵테러억제협약 미 비준국
아르헨티나, 이집트, 인도네시아, 이스라엘, 이탈리아, 요르단, 말레이시아, 뉴질랜드, 노르웨이, 파키스탄, 필리핀, 싱가포르, 스웨덴, 미국, 베트남, 한국

개정 핵물질방호협약 미 비준국
아제르바이잔, 브라질, 이집트, 이탈리아, 일본, 말레이시아, 모로코, 뉴질랜드, 파키스탄, 필리핀, 싱가포르, 남아공, 태국, 터키, 미국, 한국

미국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두 협약 모두 효력이 발생하지 않은 상태이고, 개정 핵물질방호협약 미 비준국에는 일본, 이탈리아, 브라질, 싱가포르 등 쟁쟁한 국가 상당수가 들어가 있습니다. 차기 핵안보정상회의 개최국인 미국도 비준이 끝나지 않은 겁니다. 적어도 박근혜 대통령이 네덜란드까지 가서 국가 체면이 깎였다고 부끄러워할 만한 사안은 아닌 거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 여론전보다는 국회를 열려는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국가 망신'이라는 다소 감정적인 말이 원자력방호방재법 개정안에 등장한 이유는 여론전 성격이 강해보입니다. 여당에서는 야당이 이런 나쁜 짓을 했으니 빨리 국회를 열어 법안을 통과시켜야한다는 주장을 하고 싶을 거 같습니다. 물론 오죽했으면 여론에 호소할까하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특히 미래창조과학방송통신위원회는 방송계 이슈 때문에 통신, 원자력 등 다른 법 개정안 통과 실적이 전무하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하지만 여론전보다는 국회를 열고 법 처리를 위해 노력하는 보다 진지한 모습이 필요합니다. 오해가 있다면 풀고 대화가 필요하다면 서로 만나서 협상해야 합니다. 여야가 함께 문이라도 걸어 잠그고, 끝장 토론을 해서라도 결론을 보겠다는 각오가 있었다면 국회가 지금같이 느슨하지는 않았을 거 같습니다. 이미 국회의원 100여 명이 해외에 나간 상태입니다. 어차피 3월 국회를 열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특히 여당 원내대표가 대통령 특사로 해외로 나가고, 야당이 신당으로 재편되면서 여야 협상은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3월 국회는 어쩔 수 없이 넘기자는 암묵적인 여야의 담합이 있는 거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법 통과가 필요하다고 앓는 소리내는 것과는 상반된 표정입니다.

국회에는 7월부터 지급하기로 한 기초연금 관련 법안 등 시급한 민생법안이 쌓여있습니다. 말로만 민생법안 통과가 필요하다고 할 게 아니라, 정말 국민들을 위해 필요한 법안이라고 판단한다면 여야는 당장 지금이라도 만나서 국회를 어떻게 열지 진지한 협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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