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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당 '맏형' 위정성, 보시라이 실각 숨은 주역"

"태자당 '맏형' 위정성, 보시라이 실각 숨은 주역"
위정성(兪正聲) 중국 공산당 정치국 위원 겸 상하이(上海)시 서기가 보시라이(薄熙來)가 실각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관심을 끌고 있다.

태자당 제2세대의 '맏형'인 위정성의 이 같은 역할설은 보시라이 실각이 태자당 분열의 소산이라는 측면을 지니고 있음을 드러낸다.

위정성 역할론을 부각시킨 매체는 미국에 본부를 둔 반(反)중국 인터넷 신문 대기원(大紀元)이다.

이 신문은 지난 26일 위정성이 후진타오(胡錦禱) 국가주석, 원자바오(溫家寶) 총리와 시진핑(習近平) 국가 부주석을 전력을 다해 지지함으로써 장쩌민(江澤民) 전 국가주석의 상하이방을 배경삼아 보시라이를 극력 비호한 저우융캉(周永康)을 제압했다고 보도했다.

위정성은 3월 상반기 전인대가 열리는 동안 일련의 정치 논쟁 과정에서 보시라이를 맹렬하게 공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이 결국 보시라이 실각으로 귀결되었기 때문에 그는 올가을 개최 예정인 18대(중국 공산당 18차 전당대회)에서 정치국 상무위 진입이 유력시된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당시 노선 투쟁의 격렬함을 전하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전인대 기간 정치국 위원 25명이 함께 모여 각각 5분간씩 발언하는 기회가 있었다.

보시라이는 자신의 차례가 오자 무려 40분간 장광설을 늘어놓으며 중국 공산당의 노선 전환을 주장했다.

개혁, 개방으로 경제는 발전했지만 빈부 격차가 심화, 공산당이 추구한 사회와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시점에서 공산당이 창당 초기의 정신으로 돌아가 노선 전환을 하지 않으면 민심이 유리될 것이며 공산당은 더는 공산당이 아니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후진타오가 당이 지난 30년 동안 이룩한 성과를 부정하는 것은 공산당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반박하는 것으로 일단 상황을 정리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보시라이의 거센 도전에 응전한 사람 중 겉으로 드러난 주역이 원자바오라고 한다면 숨은 주역은 위정성이라는 것이다.

'뜨는 별'로 주목받는 위정성은 누구인가.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양자 리펑(李鵬)이 태자당 제1세대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위정성은 제2세대의 '맏형'이다.

1945년생으로 1949년생 보시라이 보다 4살 위이고 시진핑보다 8세 연상이다.

보시라이가 격정적이며 좌충우돌하는 처신을 했다면 위정성은 온화한 성품에 주변과 두루 원만한 관계다.

시진핑과의 관계가 각별하며 '범(汎) 상하이방'으로 분류될 정도로 장쩌민과의 사이도 돈독하고 후진타오의 공청단파와 잘 지내고 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이 '팔방미인(八方美人)'이다.

위정성은 자신을 내세우는 성격이 아니어서 태자당 제2세대 중에서 가장 연장자임에도 선두 자리를 보시라이와 시진핑에게 내주었다.

2007년 초 천량위(陳良宇) 실각으로 공석이 된 상하이 서기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일 때 그 역시 시진핑과 보시라이 등과 함께 후보자 중의 한 사람이었으나 승자는 8세 연하의 시진핑이었다.

시진핑이 그해 말 17대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에 선출된 뒤에 위정성은 시진핑의 후임으로 상하이 서기가 되었다.

보시라이는 시진핑의 추월에 앙앙불락 했지만 위정성은 앞서 나간 '동생'을 잘 받들었다.

위정성의 가계는 화려하기 이를데 없다.

마오쩌둥(毛澤東)과 장제스(蔣介石)와 모두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의 부친은 황징(黃敬)으로 마오의 처 장칭(江靑)의 전 남편이다(황징의 본명은 위치웨이<兪啓威>다).

위정성은 황징이 장칭과 헤어진 뒤 결혼한 다른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이다.

위정성의 종조부는 대만에서 국방부장을 지낸 위다웨이(兪大維)인데 그는 장징궈(蔣經國)의 딸 장샤오장(蔣孝章)을 며느리로 맞아들였다.

장제스의 손녀가 위정성의 당숙모다.

그래서 위정성에게 붙여진 별명이 '황친국척(皇親國戚)'이다.

정체성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는 혼돈스러운 위정성의 가계 이력에 1985년 친형이 미국에 망명함으로서 혼란을 보탰다.

중국 국가안전부에 근무하던 그의 형 위창성(兪鋼聲)의 망명은 40여년 동안 미국에서 성공적으로 간첩활동을 하던 진우다이(金無怠)가 체포되는 결과를 초래, 중국의 대미 첩보망에 심한 타격을 가했다.

위정성은 1992년 한중수교 당시 산둥(山東)성 칭다오(靑島) 시장을 지냈으며 중국 최고위급 지도자 중에 한국을 가장 잘 알고 호의적인 인물로 꼽힌다.

은인자중하던 위정성은 이번 노선 투쟁의 승패를 가름하는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감을 뚜렷이 부각했다.

보시라이 노선 전환 촉구는 개혁 개방 30년 만에 제기된 것이다.

공산 정권 수립 이후 견지된 마오의 노선은 30년 만에 종식됐다.

개혁, 개방으로 요약되는 덩샤오핑 노선도 이미 30년이 지나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

보시라이는 장쩌민과 쩡칭훙의 과거권력 후원 아래 후진타오의 현재 권력과 시진핑의 미래 권력에 도전한 것이다.

위정성이 후자에 가세함으로써 팽팽한 이 대립에 일단 막을 내리게 한 것으로 보인다.

위정성이 18대에서 정치국 상무위에 진입하면 그가 맡을 직책은 정법위 서기가 될 개연성이 아주 높다.

정법위 서기는 앞선 권력과 현재 권력, 또는 현 집권 세대와 앞선 집권 세대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맡아왔다.

저우융캉은 후진타오와 장쩌민 세력 간의 가교 역할을 했으며 저우융캉의 전임 뤄간(羅幹)은 연령상으로 3세대와 4세대의 중간인 3.5세대에 해당됐다.

위정성은 나이로 보면 4.5세대이며 그의 '8방미인' 성향을 감안하면 공청단파와 태자당파의 기교 역할을 하기에 최적임자로 보인다.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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