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도박'과 '투자' 사이

욕망에 빠진 젊은이들, 그들은 왜?

[취재파일] '도박'과 '투자' 사이

"북한 경수로가 폭발해 방사능이 서울로 유입되고 있다."

지난달 6일 증권가는 요동쳤습니다. 증권가에서 자주 사용되는 '미스리 메신저'를 통해 이 같은 유언비어가 유포됐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꽤 구체적이었습니다. 조만간 보도가 될 거라면서 일본어로 된 교토통신 발 기사가 담겨져 있었고, 폭발 사진도 첨부됐습니다.

유언비어에 '주가 급락'

불과 몇 분 사이, 주가는 급락했습니다. 코스피는 9포인트, 코스피도 4포인트 가까이 빠졌습니다. 이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유언비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지만, 알다시피 주식 시장은 꽤 경솔합니다. "처음에는 그냥 찌라시인 줄 알았는데 주가가 계속 빠지니까 의심이 됐다. 주변에서도 그냥 웃어 넘기다 순간 당황한 분위기였다." 당시 메시지를 받았던 한 증권가 직원의 말입니다.

경찰이 곧바로 수사에 나섰습니다. 주가의 변동 폭을 통해 시세 차익을 노린 작전 세력의 짓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괴소문을 퍼트린 일당이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이를 주도한 사람은 대기업 소속 직원으로, 해당 대기업의 자회사에서 재무팀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35살 송 모 씨. 송 씨는 다른 일당 4명과 함께, 주가가 떨어지면 차익을 얻을 수 있는 파생상품에 투자해 2천9백만 원의 차익을 남겼습니다. 투자 금액은 1억 3천만 원이었습니다.

                

불과 9분 사이, 모든 게 끝난 '도박판'

이들은 참 쉽게 돈을 벌었습니다. 이날 오후 1시 48분, 부산의 한 PC방에 모였습니다. 허위로 된 일본발 기사는 포털 사이트 번역기를 통해 꾸며냈고, 지난해 후쿠시마 원전 폭발 사진을 검색해 첨부했습니다. 그리고 오후 1시 56분. 미스리 메신저를 통해 괴소문을 유포합니다. 애널리스트와 증권가 관계자 등 전문가 그룹 2백3명에게 보냈습니다. 메시지를 보낸 시간은 2시 5분까지 단 9분. 소문이 나는 동안 주가는 하염없이 빠졌지만 괴소문이란 게 확인되면서 7분 뒤인 2시 12분부터 다시 회복됩니다. 그 사이 차익을 남겼던 겁니다.

이들이 투자한 상품은 주식 워런트 증권인 'ELW'란 파생 금융상품. 주식을 정해진 시기에 일정한 가격으로 사고 팔 수 있는 겁니다. 선물이나 옵션과 비슷하지만 적은 금액으로 투자가 가능하기 때문에 개미들이 거래하기에 최적화 된 상품입니다. 이들은 범행을 하기 전 주식을 일정 가격에 팔 권리인 '풋'을 삽니다. 후에 주식 가격이 떨어지면 이들은 미리 정한 높은 가격에 주식을 팔 수 있기 때문에 그만큼의 차익이 남습니다. 그리고 주식이 떨어졌을 때 '콜'을 삽니다. 이건 나중에 주식을 살 권리인데, 미리 낮은 가격을 책정해 놨기 때문에 주식이 오르면 그만큼이 이득이 생깁니다.

사실 이 같은 파생상품은 비주류 경제학에서 비판의 대상이 돼 왔습니다. '딴'사람이 있으면 '잃는' 사람이 있는, 일종의 제로섬 게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스톱이나 포커와 같은 도박과 다를 게 없다는 얘깁니다. 이들에게 비싼 가격을 지불하고 주식을 산 개미들이 있었을 테고, 반대로 헐값에 팔 수 밖에 없었던 개미들도 분명 있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자신도 개미였음에도, 개미들을 상대로 부당 이익을 챙긴 셈입니다. 파생상품의 대의(大義)는 자금의 원활한 유통이라지만, 결국 개미들에게 파생상품은 도박장이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이들은 잘못된 방식으로 '투자'를 한 게 아니라 애시 당초 '도박'을 했던 것이고, 눈속임으로 돈을 가로챈 '타짜'들이 아니었을까요.

치열한 사회 그리고 욕망

더 아쉬운 건 송 씨의 범행에 가담한 이들이 대학생과 20대 젊은이였다는 점입니다. 구속된 사람 가운데 19살 김 모 씨는 한 유명 지방대학의 경제학과 학생 - 경찰 말에 따르면 '경제에 빠삭한 재원' - 이었습니다. 구속된 27살 우 모 씨와 불구속 된 24살 김 모 씨는 뚜렷한 직업은 없지만 주식에 도가 튼 사람들이랍니다. 한창 취업을 준비할 나이, 사회의 쓴 맛(?)을 경험하지도 않았던 이들은 왜 벌써부터 돈 놀이에 빠져야 했을까요.

이들에게만 돌을 던지고 싶지 않습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들먹이며 이들을 '물질 만능 주의자'라고 욕할 자격도 없습니다. 기자도 그렇게 금욕적이고 윤리적인 사람은 아닙니다. 다만 이들은 사회가 무서웠던 것 같습니다. 쥐꼬리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면서도 매일 야근을 하며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 우리 사회, 그래서 조금은 쉽게 살아보고 싶은 유혹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런지요. 애당초 이들은 나약했던 게 아니라 사회에 의해 나약하게 만들어진 것은 또 아닐런지요.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든 우리 사회의 자화상. 그래서 저는 이들보다 각박한 우리 사회가 더 미워집니다.

추신.
몇 년 된 얘기지만, 치열하게 살았던 제 친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시골에서 상경해 참 열심히 살았습니다. 이른 나이에 취업해 회사에서 많이 힘들어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 친구가 나약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가 제 친구에게 채찍만을 휘두른 게 아니었나 그게 더 원망스럽습니다. 송 씨 일당이 그 탈출구로 '작전'을 택했다면 이 친구는 '자살'을 택한 게 아니었을까요. 너무 염세적인 분석일까요.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