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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이웃과 함께 할 때 더 무서운 세상

[취재파일] 이웃과 함께 할 때 더 무서운 세상

아는 것이 병이란 속담이 있습니다. 사건사고를 다루는 '사건기자'를 오래 하다보니 병이 늘어납니다. 음식을 시킬 때는 재료는 어디에서 왔을까 의심이 들고, 승용차를 구입할 때는 그 동안 취재했던 수 많은 교통사고의 경우의 수가 떠오릅니다. 술에 취해 집에 들어갈 때는 그간 질리도록 시청한 '퍽치기' '아리랑치기' CCTV 화면이 생각나 가끔 등골이 서늘할 때도 있죠.

지하주차장을 이용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곳곳에 CCTV가 배치돼 있어도, 혼자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올가갈 때 으스스해지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CCTV야 어디까지나 사후 대처와 수사를 위한 수단이지 막상 마음 먹고 달려드는 강도를 막아줄 수 있는 무기는 아니니까요.(그래도 막상 당하고 나면 CCTV처럼 절실한 게 없다는 대부분의 범죄 피해자의 주장, 저도 공감합니다.)

특히 최근 '뒷좌석 아이 흉기 위협 인질 강도' 사건을 취재한 다음부터는 그런 두려움이 더 커졌습니다.

지난 9일 인천의 한 아파트 단지 지하주차장에서 아이를 인질로 한 강도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5살 난 딸을 승용차 뒷 좌석에 태운 어머니가 운전석에 오르자마자, 마스크를 한 괴한이 뒷 좌석에 따라 올라 아이의 목에 커터 칼을 들이댄 겁니다. 놀란 엄마는 괴한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순순히 한적한 곳에 있는 현금인출기까지 운전해 가, 범인이 차 안에서 아이를 잡고 있는 동안 현금 170만 원을 인출해 괴한에게 바쳤습니다. 돈을 준 다음에는 괴한이 지정하는 곳까지 괴한을 데려다 주기 까지했죠.
                   

'뒷좌석 올라타기'는 사실 고전적 수법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도 많이 나오죠. 그런데 이 사건은 특이한 점이 있었고, 덕분에 '기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경찰이 지하 주차장 주변 CCTV 화면을 분석해 유력한 용의자를 잡고보니 피해자들의 아랫집에 사는 '아랫집 아저씨'였던 겁니다.

범행을 자백한 피의자 38살 전모 씨는 범행 이전까지는 '윗집 여자와 아이'라는 걸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사실 아파트 윗집에 누가 사는지 아는 사람이 몇 이나 되겠어요? 그런데 범행 과정에서 지갑을 넘겨 받아 피해 여성의 운전면허증을 보다가 주소란을 확인하고 '윗집 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합니다. 그래도 아이의 목에 칼을 대고 170만 원을 빼앗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죠. 결국 흔하디 흔한 고전적 수법인 '뒷좌석 올라타기 인질 강도'는 '아랫집 아저씨의 인질 강도'라는 포인트 덕분에 메인 뉴스인 8시뉴스까지 타게 됐습니다. 이른바 '제목이 나와주는 기사'였으니까요.

사건을 취재한 다음 날, 집에 돌아와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면서 주위를 한 번 더 돌아봤습니다. 다행히 누군가 있더군요. 조금 안심이 됐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엘레베이터를 탔습니다. 거울을 바라보며 초췌한 모습에 한숨 짓고 있다가 문득 등골이 서늘해졌습니다. 그날 인천의 아파트 단지에서 인질 강도를 당한 어머니와 딸도 피의자 전씨와 함께 수없이 엘레베이터를 탔겠지 싶어서였습니다. 아무도 없는 공간보다 '이웃집 식구'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더 공포스러웠습니다. 이런제 상황이 제가 '사건기자'라서인지, 아니면 사회가 너무 흉흉해져서인지는 잘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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