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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대통령 취재기(1) 전두환 전 대통령

2천 3년 2월 25일, 대한민국 국민들은 제 16대 대통령을 맞았습니다.

젊고 개혁지향적인, 그리고 국민의 힘으로 대통령이 됐다고 생각하는 노무현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이제는 정말 나아지겠지, 또 달라지겠지" 하는 기대들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를 지지했던 사람이나 반대했던 사람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됩니다(어쩌면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한나라당의 젊은 당직자들은 유독 취임식날 등산 일정을 많이들 잡아놓았다고 하더군요. 패배자의 입장에서 승리한 쪽의 잔치장면을 보고 싶지 않은 마음들일 겁니다).

취임식을 앞둔 지난 19일, SBS 뉴스추적에서는 '대통령, 성공할 수 없나?'는 제목으로 전직 대통령들의 성공과 좌절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성공 가능성을 조망해 봤습니다. 따라서 이 아이템을 위해서는 전직 대통령들을 만나는 게 급선무였죠. 정치부 취재 경험을 살려 무작정 시도해 보기로 했습니다.

살아있는 전직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까지 모두 5명입니다만, 취재 시점에서는 아직 김대통령이 퇴임전이었기 때문에 4명이었습니다. 일단 전두환, 김영삼 전 대통령을 축으로 4명 모두에 대한 접촉을 시도해 보기로 했습니다.

이 중에서 우선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취재기를 써보려고 합니다.

군사반란과 내란의 주동자요, 2천억원이 넘는 비자금을 챙긴 부정 축재자라는 법적 심판을 받았던 인물, 동시에 누란의 위기에서 경제를 안정시켜 고도 성장의 기반을 쌓았던 군인 출신의 대통령이라는 엇갈린 평가도 있습니다. (실제로 97년 외환위기 당시 "차라리 전두환때가 좋았다"는 말들이 떠돌았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특히 화통하고 거침없는 그의 화법 때문에 그를 인터뷰만 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뉴스추적을 볼 것이라는 현실적인 계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2월 10일, 무작정 연희동을 찾았을 때 골목 입구를 지키고 있던 의경들이 취재진을 막았습니다. 잠시 뒤 나온 비서관은 "연희동으로 온 뒤에 어떤 언론과도 인터뷰를 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할 수 없다. SBS와 인터뷰를 한다면 다른 데서도 요구할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일단은 발걸음을 돌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그 전에 전화를 통해 취재이유를 설명하고 질문요지를 팩스로 보내기는 했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거부 의사를 전달 받았습니다. 하지만 말씀드린 것 처럼 인터뷰를 하지 못하면 아이템 자체가 방송 불가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취재팀은 더욱 의욕적으로 전두환 인터뷰에 주력했습니다.

그 다다음날 이번에는 저를 빼고 AD 두 명이 6mm 카메라를 들고 연희동을 찾았습니다. 그가 그 날 골프를 치기 위해 집을 나설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일단 집을 나서는 그의 모습만이라도 찍자는 것이었죠. 그러나 결사적으로 막는 의경들과 몰래 나가기를 의도한 비서진의 치밀한 전략에 의해 무산됐습니다.

저는 취재팀 전원과 함께 골프가 끝날 무렵 골프장을 찾았습니다. 이번에는 당연히 골프장에서 난리가 났구요, 결국 비서관 한 명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이렇게 하지 말고, 다시 한번 질문서를 보내달라. 그러면 인터뷰를 하는 방향으로 추진하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남자답게 약속하겠다는 그의 말을 믿어보기로 하고 철수했습니다.

12.12, 5.18 사건 수사와 재판과정, 97년 12월 석방 당시, 그리고 99년 경남 일대 산을 찾던 전두환씨를 취재하면서 '남자다움'과 '신용'을 중시하던 그의 모습이 기억나서 였습니다. (혹, 그를 미화하는 글이 아니냐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전혀 그런 의도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밝힙니다.)

예상대로 연희동에서 일요일(2월 16일) 인터뷰를 하겠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인터뷰 후에 가족,친지들과 함께 배드민턴을 치는 모습도 취재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덤까지 얹어서 말입니다. 방송 시점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상황이어서 이번에도 취재팀 전원이 연희동 전두환씨의 집을 찾았습니다. 저희 나름대로 총력전이었던 셈입니다.

약속 시간이 되자 나타난 전두환씨는 73살이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강하고 활달한 모습이었습니다. 99년 봄 등산을 함께 하며 "광주도 갈 수 있다"는 인터뷰를 따냈을 당시 (물론 정식 인터뷰가 아닌 즉석 인터뷰였죠)의 모습 그대로 였습니다.

"오랜만이구만"하며 내미는 그의 손에서는 힘이 느껴졌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의 성공과 좌절에 관한 생생한 증언이었기 때문에 저는 정신을 바짝 차렸습니다.질문 하나라도 세밀하게 머릿속으로 정리해가며 이 인터뷰가 결국 역사의 자료가 될 것이라는 생각하며 스스로를 다졌답니다.

전씨는 "청와대 나온 뒤로 이렇게 인터뷰를 하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며 여유로운 모습이었습니다. 일단은 그의 성공에 관한 얘기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자연스럽게 경제문제를 꺼냈습니다.

"준비없이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더욱이 정치는 물론 나라 전체가 어려운 시점이었기 때문에 긴장의 나날을 보낼 수 밖에 없었다. 경제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빴다. 매일 아침 김재익 당시 경제수석에게 과외를 받았다. 경제 분야에 관한한 그가 대통령이었던 셈이다. 6개월 정도 하고 나니 눈이 좀 뜨여지는 기분이었다. 국민들도 혼연일체가 돼서 한 1년 지나니 회복되고 역사상 처음으로 흑자도 낼 정도로 경제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며 힘주어 말하는 그를 보며 무척이나 자랑스러워 하고 있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힘들었던 부분을 얘기할 때는 93년 미얀마에서 있었던 테러사건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그건 99년에도 들었던 얘기지만, "미안마 정부측의 착오로 3분 정도 늦게 도착하게 됐는데 결국 그 3분이 나를 살린 셈"이라며 비명에 간 수행원들의 죽음을(17명 정도로 기억하더군요) 안타까와 하기도 했습니다.

87년 11월에 있었던 KAL기 폭파사건도 힘들었던 순간으로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단임을 실천했다는 데 대해서도 대단한 자부심을 나타냈습니다. 이번 인터뷰 뿐만 아니라 그가 언제 어디를 가든 꼭 거론하는 부분입니다.

그 때부터가 본론이었습니다. 김영삼,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국민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겨진 80년 5월의 광주와 비자금 사건에 대해서는 어떤 얘기를 할 지 궁금했습니다. 다행스럽게 그는 껄끄러운 질문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얘기해 나갔습니다. 저나 카메라 기자 모두 긴장속에 인터뷰를 진행해 나갔습니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서는 인사문제만 제외하고는 잘했다고 생각한다. 잘한 게 많다. 남북문제도 그렇고... 대북 송금문제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갖기 힘들어서 얘기하기가 힘들지만... 경제도 잘 해냈고... 다만 인사문제에 있어서 지역편중 이런 부분때문에 다른 업적들까지 오해를 받는 것 같다"고 긍정하는 모습이었습니다.

반면 '역사바로 세우기'를 내세워 자신을 구속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앙금이 가시지 않은 듯 했습니다. "자기만이 정통성이고 나머지는 부정이다, 그거는 나라를 수십년 후퇴시키는 거고, 국제적으로도 신뢰를 무너뜨리는 거다. 난 퇴임하면서 당할 각오는 했지만..."

"앞으로 나가야지 자꾸 뒤로 잘못한 걸 거론하면 과거 나한테 어떻게 했다, 섭섭하게 했다 그거에 대한 보복으로 뒤로 자꾸 돌아가면, 다른 나라는 전부 앞으로 나가는데 우리가 뭐 발달된 나라라고 뒤로만 가서 원수 때려잡고 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영웅이 되느냐, 똑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더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앞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는 것 아니냐, 무슨 소급을 하고, 이런 것은 평가할 가치도 없다고 본다"며 그는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광주에 대한 그의 시각은 여전히 '부정적'이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그의 집권 배경이었기 때문이어서 그런 지 모르겠습니다만 분명 그는 그 당시 정당한 선택을(진압) 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광주는 역사의 심판에 맡길 수 밖에 없다. 총기를 들고 일어났고, 계엄군 입장에서는 당연히 진압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내가 나중에 대통령이 되니까 내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광주사태를 진압한 걸로 몰고 가더라. 재판할 때 내가 그러지 않았다는 게 분명히 밝혀졌다. 군은 지휘계통에 의해 움직이는 거다. 중앙정보부장이 아무리 세도 사단장 보고 나가서 움직이라고 해도 절대 안 움직인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당시 계엄사령관 부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재판에서도 광주에 대해서 만큼은 절대 책임을 안졌다. 광주 사단장도 있고 2군 사령관도 있었다. 당시 광주에 있던 특전사도 계엄군 진압 지원한 것이지, 진압을 지휘했던 게 아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호용 특전사령관이 내 친구니까 내가 정호용이를 시켜서 진압했다 이렇게 오해하고 있다".

"정호용이 내 아들이래도 그 건 할 수 없는 거다. 당시 소준열 장군도 광주출신이었는데 재판 나와서 다 자기가 지휘했다고 했다 그게 사실이거든. 어쨌든 불행한 일이었다. 광주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나보고 광주 가서 분신자살을 하라 그러면 해결된다 그러는데 얼마든지 할 용의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결이 안된다. 광주 사람들에게 응어리진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역사의 심판에 맡길 수 밖에 없다. 내가 재판받고 사형까지 받지 않았는가?"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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