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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마지막 인문 기행 《나의 미국 인문 기행》 [북적북적]

끝나지 않는 마지막 인문 기행 《나의 미국 인문 기행》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416: 끝나지 않는 마지막 인문 기행.. 서경식 '나의 미국 인문 기행'
"당시의 나, 극동에서 온 정치범 가족인 젊은이에게 소박한 선의를 갖고 다가와준 사람들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런 사람들의 작은 힘이 세계를 바꾼다." 따위의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하기에는 나는 너무나 암흑만을 보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또는 아직도 더 크고 깊은 암흑을 볼 일이 남아 있는지도. 하지만 나는 지금도 전혀 나아지지 않는 세계 여기저기에서 하루하루 현실에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내 경험의 작은 조각이라도 제시하여 참고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 그것이 나의 끝나지 않는 '인문 기행'의 한 페이지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주민, 이산인데 원래는 고국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태인을 일컫는 말에서 비롯됐습니다. 그 사회에 온전히 섞이지 못하고 여러 이유로 소외되는 걸 주요 특징 중 하나로 합니다. 한국인 중에도 해외에 있는 이들 중에 디아스포라에 해당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경계인, 회색인 같은 말들과도 겹쳐지는 정체성이 있습니다.

여기 한 사람, 일본에서 재일조선인 2세로 태어났습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나중에 교수도 됐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 서울에 유학 와 있던 두 형이, 조작된 간첩단 사건으로 투옥됐습니다. 형들을 비롯한 양심수의 석방을 요구하는 구명운동에 뛰어들게 됩니다. 그 형들은 한국의 대표적인 양심수로 일컬어졌던 서승, 서준식입니다. 20년 안팎의 수감 생활 끝에 민주화 이후에야 1988년, 1990년에 각각 석방됐습니다. 음악과 미술을 좋아했습니다. 한국어가 서툴고 일본어가 모어인 재일조선인입니다. 난민도, 국민도 아닌 반 난민, 경계에 선 소수자로서의 사유를 담은 인문기행기를 여러 편 썼습니다. 2023년 12월 별세한 서경식 선생입니다. 그의 마지막 저서 <나의 미국 인문 기행>를 읽습니다.
"나는 서경식 선생이 쉽게 마무리짓지 못했던 미국 기행을 '인문 기행'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느낌으로 읽고, 옮겼다. 코로나19 팬데믹이라는 세계사적 위기, 정년퇴임에 뒤따른 어수선함과 건강 악화 같은 변화를 우선 들 수 있겠지만, 그 탓만은 아닐 것이다. 서경식 선생이 직접 언급한 것처럼 '독자 여러분이 왕복할 세 단위의 시간대' 때문이다. 그건 최근(이자 마지막으로) 미국 땅을 밟았던 2016년, 두 형의 석방과 지원 활동을 위해 미국의 인권단체와 국무부를 방문했던 1980년대 중후반, 그리고 이 책에 담긴 글을 쓰던 2019~2020년이라는 시점이다."
- 여는 글에서(번역자 최재혁)

형들의 구명운동을 위해 1980년대 찾았던 미국, 2016년 방문했던 미국, 그리고 코로나 창궐 속의 2020년 미국, 그가 경험한 세 가지 시기의 미국은 꽤 달라 보이지만 세계 최강대국, 자본주의의 총본산 미국, 그리고 트럼프 집권 시기를 지나 '각자도생'으로 치닫던 아메리카이면서도 '선한 아메리카'이기도 합니다. 이 마지막 인문 기행에는 그런 희망을 놓지 않는 통찰과 사유가 담겨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나는 머무르던 도시에서 짬이 나면 혼자서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결사적인 반독재 투쟁이 이어지고 있는 시기였다. 형들은 옥중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걸맞은 바른 처신이었는지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런 나를 괴이하다 보았을 것이다. 나는 스물네 시간을 투쟁에 바치는 모범적인 활동가상에서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다만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찾듯, 좋은 미술 작품과 조우하기를 바라며 떠돌아다니는 일이 내 자신의 생존에 필요했다는 점은 확실하다."
- 1장 뉴욕에서
"나는 직업도 없는 젊은이였고 병든 자였다. 정치범의 가족이며 매일같이 옥중에 있는 형들의 석방을 호소하며 다니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들이 살아서 출옥하리라는 희망을 거의 갖고 있지 않았다. 나 자신의 내일이 어떨지조차 전혀 내다볼 수 없었다. 그녀를 동정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위로받고 싶었던 것뿐이지는 않았을까.

나와 B 씨는 호퍼의 그림처럼 한산하고 고요하기 그지없던 카페에서, 서로의 고독을 강하게 느끼면서 말없이 한참을 앉아 있었다. 입을 열면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를 말해버리고 말 것 같았기 때문이다.
...
30년 전의 나는 광기와 죽음의 갈림길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 갈림길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지인들도 적지 않다. 그때 나는 지금 이 나이까지 살아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B 씨는 지금도 건강할까. 그때의 일을 생각해 낸 것도 호퍼의 작품이 가진 힘 때문이다."
- 1장 뉴욕에서
"세계는 피투성이가 되어가는 중이었다. 나 자신도 그런 피바다에 빠져 익사할 것만 같았다. 내가 처음 서양 미술 순례를 떠난 것은 1983년 10월. 아키노 살해 사건으로부터 두 달 정도 지난 뒤였다. 일시적이나마 '다른 세계'로 몸을 옮겨가고 싶었고, 어떻게 해서든 숨을 쉬고 싶었다. 하지만 미술 순롓길에서 닿는 곳마다 나를 끌어당긴 작품 역시 역사 속 잔혹한 장면을 그린 피투성이 그림들이었다."
- 2장 워싱턴 D.C.에서
"나는 사이드에게 음악이라는 측면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꽤 늦게 깨달았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매년 여름 잘츠부르크 음악제를 찾으면서 서양 고전 음악의 깊고 넓은 세계를 만나 그 경험을 『나의 서양음악 순례』라는 책으로 그럭저럭 펴냈을 무렵에야 사이드에게서 음악이 가진 중요성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내 경험은 "'재일조선인'이라는 존재인 나 자신에게 '서양 고전 음악'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라는 질문에 관한 답을 더듬어 찾아가는 일이었다."
-6장 아메리카 1에서
"9·11 테러 발생 직후, 미국의 텔레비전 방송국은 사건 소식에 환호성을 지르는 팔레스타인 민중의 영상을 내보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반사적으로 사이드를 떠올렸다. 사이드라면 지금 어떤 말을 했을까. 문제의 영상은 '팔레스타인 사람=테러리스트'라는 서구인의 평균적인 편견을 더욱 공고히 해 적개심을 부채질하는 효과를 발휘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팔레스타인 민중이 사건 소식에 환호하고 싶어진 감정의 원인을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희생자를 살피는 마음이 부족하다고 비난하기에 앞서, 미국을 뒷배로 둔 이스라엘의 횡포로 팔레스타인 민중은 또 얼마나 부당한 희생을 당해왔는지, 그 희생에 자신은 얼마나 관심과 동정을 가졌는지도 반성해보아야 할 일이다.
...
세계 각국에서 찾아든 관광객과 뒤섞인 채 밝은 햇볕이 내리쬐는 그라운드 제로에 서서 나는 새삼 생각했다. 9·11에 의해 막이 열린 21세기, 인류는 앞으로 얼마나 더 파괴와 살육을 쌓아나가게 될까."
-7장 아메리카 2에서
"그래도 그렇게 나누어진 단편 속에서 내가 '선한 아메리카'라고 생각하는 측면(이는 벤 샨이나 에드워드 사이드를 통해 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하려 했다. 그 이유는 나 자신이 간직한 '선한 아메리카'를 향한 애착에서 비롯되었지만, 미국이라는 국가가 '선한 아메리카'의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라는 기대를 놓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으로서는 실낱같은 기대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극동' 출신의 한 디아스포라의 눈에 비친 '선한 아메리카'의 기억을 먼 장래를 위해 남겨두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내 젊은 나날들, 그 암흑시대에 '선한 아메리카'는 나를 격려하며 힘을 불어넣어 주던 존재였다."
-맺음말에서

사실 저는 선생의 글은 주로 칼럼으로 읽어왔는데 '미국 인문 기행'이라기에 덥석 집어 들었다가 좀 당황했습니다. 선생의 드러난 삶이 그렇듯 발랄하거나 즐겁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절망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담고 있다는 점을 찾아서 다행이었습니다. 첫머리에 읽었던 게 이 책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2023년 12월 17일 맺음말을 쓰고 다음날 12월 18일 선생은 세상과 작별했습니다. 고인의 영면을 바랍니다.

*출판사 반비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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