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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쏟아내기만 했던 "공개서한"의 시대, 이제는 끝내자 [스프]

[뉴욕타임스 칼럼] The Age of the Open Letter Should End, By Roxane Gay

스프 뉴욕타임스칼럼
 
*록산 게이는 뉴욕타임스 오피니언에 글을 기고하는 작가다.
 

서로 견해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모여 치열하게 토론을 벌인 끝에 소중한 공통분모를 찾아낸다는 이야기, 들어보셨는가. 다 "좋았던 시절" 이야기다. 너무 까마득해서 옛날옛적 일처럼 들릴 수도 있다. 다른 의견을 낸 사람이 원하는 방식으로 꼭 토론이 진행되지 않더라도 지난한 정치적인 토론을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만약 우리가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우리는 모든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다. 서로 간의 차이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가는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장밋빛 색안경을 끼고 과거를 바라보는 실수를 범하곤 한다. 마치 옛날에는 정중함과 예의를 잃지 않는 신사숙녀들만 모여 (물론 숙녀는 별로 없고, 거의 다 신사였겠지만) 늘 타협을 이끌어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과거에는 모든 게 더 예의 바랐을 거란 가정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저 자기가 바라는 대로 만들어낸 과거를 믿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만 효용이 있는 거짓말이다.

사실 공개 서한은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부터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버밍엄 감옥으로부터의 편지"에 이르기까지 적어도 두 세기 동안 공개 서한은 줄곧 수사학적인 도구로 쓰였다. 공개 서한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역량을 강화하고, 사람들에게 목소리를 주며, 자신이 따르는 대의를 지지하고, 중요한 사회적 이슈에 관심을 끌어모으며, 분노를 표출하거나 결정을 지지하고, 무지를 질책하며, 인간성을 지키는 데 쓰였다.

공개 서한은 남을 설득하는 글이지만, 동시에 간청하는 글이기도 하다. 편지를 쓰는 이는 제발 내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간청한다. 제발 행동에 나서달라고 절절이 호소한다. 제발 바꿔 주세요, 제발요.

나는 공개 서한이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 공개 서한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지난 몇 년간 시급하고 긴요한 일이라 생각한 몇몇 공개 서한에 내 이름을 보태기도 했다. 그러나 편지가 (원래 목적대로) 공개되고 나면, 이제는 어디에 내 주장을 전하고, 나아가 같이 행동하자고 간청해야 할지 다소 막막해졌다. 공개 서한이라는 방식 자체가 이렇게 매우 제한적이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주장을 편다. 그러고 나면 이제 뭘 해야 하나?

우리가 관심을 쏟는 문제에 반드시 해결책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공개 서한을 끊임없이 쏟아낸다고 문제의 원인을 더 잘 찾는 것도 아니고, 해결책이 절로 나오는 건 더더욱 아니다. 어떨 때는 공개 서한이 범람해서 사람들이 오히려 새로운 정보에 귀를 닫고 기존 생각을 고수하게 되는 부작용도 있다. 설사 공개 서한을 읽고, 누군가 그 주장에 동조해 마음을 바꿨다고 해보자.

그럼 이제 그 사람은 새로운 관점과 신념을 가지고 무얼 어떻게 해야 하나? 편지에 목표를 위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면, 그렇게 투표로 의사를 모으거나 인식을 제고해서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를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접목할 것인가?

1962년, 제임스 볼드윈은 조카가 성인이 되면 겪게 될 인종차별투성인 세상을 경고하는 격문을 썼다. 편지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네가 태어난 곳을 바꿀 수는 없어. 네가 흑인이 아니었다면 전혀 신경 쓰지 않아도 됐을 온갖 인종차별의 경험을 피하지 못했겠지. 아마 그 과정에서 네 야망은 단단한 벽에 부딪쳐 꺾이고 수없이 쪼그라들었을 거야. 너는 네가 아무런 가치도 없는 인간이라는 끔찍한 메시지를 에두르지도 않고 수도 없이 반복해 들려주는 사회에 태어났단다. 누구도 너가 탁월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지 않아. 너는 그저 평범하게, 중간만 가도 만족하는 삶을 살게 될 거야.

편지는 분명 이제 막 태어난 조카를 향한 글이었지만, 엄존하는 인종차별이란 현실 앞에서 전쟁 같은 삶을 사는 모든 흑인과 유색인종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했다. 또한, 편지를 읽는 백인들에게는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 어떻게 흑인들의 상상력과 열망을 억누르는지 고발한 글이기도 하다. 바로 여기에 공개 서한의 묘미가 있다. 즉, 편지에 수신인을 명시해 놓지만, 동시에 (누구나 볼 수 있는 공개 서한이므로) 이 편지를 접하게 될 부수적인 독자들이 있다.

그러나 공개 서한이 늘 심오하거나 고상하거나 중요한 교훈을 담고 있지는 않다. 최악의 경우, 공개 서한은 작성자가 자기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에게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은 의견과 불만을 정제하지 않은 언어로 토로하는 있으나 마나 한 기회에 불과하다. 얼핏 보면 특정 독자를 대상으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전하는 듯한 편지는 많은 경우 절제되지 못한 혼잣말일 뿐이다. 이런 사람은 연단 위에 선 설교자로, 자기가 하는 말에나 신경을 쓰지 듣는 이의 반응에는 별 관심이 없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공개 서한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많은 청중에게 자기 생각을 전할 통로를 갖춘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트위터나 인스타그램, 틱톡에 올리는 말, 사진, 이모티콘이 전부 다 어떤 의미에선 사소한 공개 서한이다. 우리는 암암리에 내 말을 들어 달라며, 나를 봐 달라며 관심을 갈구한다.

이는 수십 년째 이어진 갈등이자, 지금껏 누구도 풀지 못한 숙제다. 여기에 내가 감히 어떤 평결을 내릴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지난 몇 달간 내가 받은 전례 없이 많은 공개 서한을 생각하면, 공개 서한에 관해 뭐라도 얘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전쟁을 지지하는, 반전 운동에 동참을 호소하는, 당장 휴전을 촉구하는, 조건 없는 휴전에 반대하는 편지 등 그야말로 온갖 종류의 격문이 쏟아졌다.

사람들은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 대화나 토론을 시도하는 대신 청중을 정교하게 선별한 다음 이들에게 반박할 여지를 최대한 없앤 일방적인 주장을 펴는 쪽을 택했다. 편지를 받아보는 이들은 굳이 쓸데없이 내 생각을 펴고 편지의 내용에 조목조목 반박하는 대신 그저 남이 써준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대체로 동의하는" 말에 서명 한 번으로 이름을 보탠다. 중요한 일에 동참하면서 내게 미칠 피해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지난해 10월 7일,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향해 잔인무도한 테러 공격을 감행한 지 벌써 반년이 더 지났다. 하마스는 지금도 100명 넘는 이스라엘 시민을 인질로 잡고 있다. 팔레스타인 보건부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의 반격으로 숨진 팔레스타인 민간인 숫자는 3만 3천 명이 넘는다. 보복이 또 다른 보복을 부르는 피의 악순환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지긋지긋한 분쟁 앞에서 무기력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우리는 누구나 옳은 일을 하고 싶고, 바른말을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정확히 어떻게 해야 그럴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공개 서한은 우리 손에 허공을 향해 외칠 수 있는 마이크를 쥐여 줬다. 끔찍한 고통을 낳는 분쟁을 제발 멈춰 달라는 공허한 외침이 끝없이 울려 퍼진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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