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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 읽지 않을 수 없는 책…정지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북적북적]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 읽지 않을 수 없는 책…정지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400: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 읽지 않을 수 없는 책… 정지아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살아있는 모든 것의 슬픔을 애도하며 나는 한 방울의 눈물을 찔끔 떨궜다. 위스키든 소주든 천천히 오래오래 가만히 마시면 누구나 느끼게 된다. 살아있는 모든 것에 대한 연민을.” 

술.  
 
음주의 갖은 폐해는 잠시 제쳐두고 보면... 술은 그냥 그렇지만 술자리를 즐긴다는 이들, 아예 술을 입에도 대지 못한다는 이들, 한때는 많이 마셨으나 이제는 여러 이유로 끊었다는 이들... 다양한 분포가 있겠죠. 저는 어려서는 피할 수 없어 많이 마셨고 종종 좋아하기도 했는데 요즘은 전처럼 많이 마시지는 않고 종종 술 자체를 즐기려고 한다 그런 정도입니다. 술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하나둘 돌이켜보면 많긴 하네요. 그런 추억을 잘 모아 글로 써보면 어떨까... 싶다가도 저는 그 정도의 문재가 있거나 술에 진심이진 않았겠네 싶습니다. 
 
작년 베스트셀러였던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쓰고 그 한참 전에 <빨치산의 딸>을 썼던 정지아 작가가 첫 에세이집을 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읽어보고 싶었는데 제목마저 이렇게 붙였으니 '아 이건 피할 수 없는 걸' 싶었습니다.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니까요>.   
 
첫 에세이를 술에 대한 것들로 채울 정도니 술에 진심이라는 건 쉽게 짐작이 가는데 가장 많이 언급하는 술이 조니워커 블루라는 건 의외였습니다. 그다음은 시바스리갈이라는 점도요. 추억의 패스포트나 캡틴큐 같은 술도 등장합니다. 또 하나는 이전 스브스프리미엄 '그 사람'에서 정지아 작가를 다뤘을 때 그 글의 제목이 '유쾌하고 또 유쾌한 사람'이었는데 진지함과 유쾌함이 따로 가는 것만은 아니지만 확실히 유쾌한 사람이구나 라는 게 글에도 충분히 넘친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처음 보는 사람들이 나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사람들은 꼴딱꼴딱 침을 삼키며 내 손에 들린 패스포트를 구세주인 양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각자의 손에는 코펠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이런 젠장. 위스키를 코펠에? 이건 위스키에 대한 예의가 아니잖아!라고도 말하지 못했다. 나는 부들부들 떨며, 그게 추위 탓인 양 애써 감추며 사람들의 코펠에 위스키를 콸콸 따랐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으로 만났듯 모르는 사람으로 헤어졌다. 흐린 램프 아래 보았던 그들의 얼굴은 지금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의 코펠 잔에 위스키를 따르던 순간의 안타까움, 나의 정체를 발각당한 순간의 당혹감, 모두가 같은 편, 모두가 위스키에 취했다는 기이한 연대의식만이 아직도 생생하게 떠오를 뿐이다. 인생 최초의 위스키 패스포트는 내게 지리산의 겨울밤이다. 낯선 이들과 따스히 함께했던." 
 
"어둠 속에서 옆방의 청춘은 숨죽여 사랑을 나누고, 우리는 소리 죽여 술을 나누었다. 서글픈 노래는 장병의 짧은 비명과 함께 허무하게 빨리도 끝났다. 그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뜻밖에 우리의 청춘도 저토록 짧을지 모르겠다는." 
 
"우리는 그날로부터 3박 4일간 내리 술을 마셨다. 술은 소주였고, 배달도 없던 시절이라 안주는 내가 집에서 해 먹던 반찬 쪼가리 정도였다. 전까지 나는 술을 그렇게 마셔본 적이 없다. 오늘의 나를 만든 역사가 그날 시작되었다... 우리도 자야 하지 않을까 싶을 즈음, 선생이 가만히 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고는 다시 술잔을 잡았다. 대신 성태가 선생이 자고 나온 방으로 들어갔다. 이상도 하지. 두어 시간 자고 일어나 다시 술을 마시면 순식간에 자기 전의 취기가 돌아왔다." 

아버지가 따라놓은 맥주를 몰래 홀짝여봤던 중학생 때, 어쩌다 처음 취해봤던 고등학생 시절, 호주머니 돈을 모아 소주 몇 병에 새우깡 안주로 잔디밭에서 취하도록 마셨던 때, 인생 최고의 맥주를 마셨던 버몬트 여행, 술에 관한 추억을 떠올려보면 끝도 없을 것 같네요. 결국은 늘 그렇듯 함께 했던 사람과 그 시간의 마력에 술은 양념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마시지 않을 수 없는 밤"이라는 건 그 사람과 함께 하는 밤, 무언가를 성취하거나 좌절했거나 혹은 지금 순간과 분위기를 오래 천천히 가만히 이어가기 위한 몸짓 아니었을까요. 이 책 덕분에 제가 마셨고 앞으로도 마실 술과 그 주로 밤의 시간과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출판사 마이디어북스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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