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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에는 무슨 의미가? [북적북적]

과연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에는 무슨 의미가? [북적북적]

[골룸] 북적북적 397: 과연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에는 무슨 의미가?
"우리 회사에선 내가 껌 종이 같은 사람이라는 걸 이재 씨는 알까. 식대 인상을 제안하며 대표를 설득하기 위해 얼마나 잔머리를 굴렸는지 알까. 대표가 너무 까칠해지지 않도록 마음의 수분을 적절하게 보존해 주고, 직원들의 열을 밖으로 내보내 녹는 것을 방지해 주는 사람. 그러나 버려질 땐 껌 종이처럼 꼬깃하게 뭉쳐져 가차 없이 던져지는 존재, 그게 나라는 걸." - 이서수 <광합성 런치>에서

긴 연휴가 지났습니다. 연휴라지만 전혀 쉬지 못한 분들도 있을 테고, 며칠 더 휴가를 내는 분들까지 5천만 명 저마다의 시간이 지나갔습니다. 저는 중간에 일하는 날도 있었지만 그래도 여러 날 쉬고 출근하니 다시 일 모드로 돌아가기 쉽지 않더라고요. 꾸역꾸역 일하고 있습니다.

일, 노동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하는 일 없이 놀고먹으면 좋겠다 싶다가도 또 그러고 있으면 싫겠지 싶기도 하고, 노동의 대가가 너무 적은 건가 싶을 때도 있고 오늘은 월급루팡이었구나 싶은 날이 있기도 하고. 먹고사는 문제는 말할 것 없이 중요하지만 그러기 위해 해야 하는 일과 그 과정에서 비애를 느끼기도 하고.

그런 먹고사는 문제, '월급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한국 작가 11명이 모여 소설을 각각 썼습니다. 이번 북적북적에서 함께 읽는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입니다.
월급사실주의라는 이름은 다분히 1950~1960년대 영국의 싱크대 사실주의를 의식했다. 지난해 동인 참여를 제안하면서 작가분들께 미리 말씀드린 문제의식과 규칙은 있다. 문제의식은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한국소설이 드물다. 우리 시대 노동 현장을 담은 작품이 더 나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규칙은 이러했다.

1. 한국사회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는다. 비정규직 근무, 자영업 운영, 플랫폼 노동, 프리랜서 노동은 물론, 가사, 구직, 학습도 우리 시대의 노동이다.
2. 당대 현장을 다룬다. 수십 년 전이나 먼 미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여기'를 쓴다. 발표 시점에서 오 년 이내 시간대를 배경으로 한다.
3. 발품을 팔아 사실적으로 쓴다. 판타지를 쓰지 않는다.

삼각김밥 공장노동자, 학습지 교사, 군무원, 중소기업 직원, 현장소장, 여행사 직원, 기자, 세입자, 배달라이더, 한국어교사, 통번역가, 기간제교사... 다양한 삶의 현장과 각기 다른 이야기를 관통하는 걸 우선 하나 꼽으라면 생생함입니다. 그야말로 '지금, 여기'에서 먹고사는 사람들입니다.
"권고사직을 당한 직원들이 반납하는 노트북에 알록달록한 스티커가 붙어 있으면 총무팀 직원이 "처음 지급받을 때와 같은 상태로 반납하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웃기시네"라고 그냥 떠나는 사람도 있었고, 노트북을 집어던지는 사람도 있었고, 조용히 옆자리에서 스티커를 다 떼고 가는 사람도 있었다. 스티커를 떼면서 울음을 터뜨리는 사람도 있었다." - 장강명 <간장에 독>에서

X세대 부장과 Z세대 팀원 사이에 낀 중간 M세대 팀장의 고민과 착각, 비용을 줄이고 사람을 덜어내려는 관리자, 경영자와 반발하는 직원 노동자, 전통적인 분위기의 업계 1위 업체가 코로나 사태를 맞아 구조조정당하는 실태와 거기 처한 사람들, 월급 오르는 속도의 몇 배, 몇십 배로 치솟는 집값에 열심히 일하고는 제자리, 혹은 주변부로 밀려나는 괴상한 상황... 이 시대 이 순간에도 벌어지는 엄중한 문제들을 담고 있습니다.
"대책 발표 하나만으로 내가 마련해야 할 종잣돈 규모가 연봉만큼 늘어났으니 말이다. 청계천 뷰 주상복합아파트를 비롯해 아슬아슬하게 사정권에 걸쳐 있던 매물들이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나는 마치 허허벌판에서 숨바꼭질의 술래가 된 듯 막막함을 느꼈다...

전세기간 만료일이 다가오자 건물주는 내게 전세금을 1000만 원 올리겠다고 통보했다. 건물주의 통보가 야속했지만, 6000만 원으로 같은 조건의 원룸 전세를 구할 자신이 없었다. 알트 코인을 손절매하고 남은 돈을 건물주의 계좌에 입금하니 통장이 텅 비었다. 그렇게 나는 이 년 전에 서울로 올라왔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처지가 된 채 나이만 두 살 더 먹고 말았다." - 정진영 <숨바꼭질>에서

11인 11색, 2024년 시즌에도 월급사실주의가 이어질 수 있을까요? "치열하게 쓰겠습니다"는 장강명 작가의 다짐처럼 치열한 마음을 갖고 시시때때로 치열하게 임하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출판사 문학동네로부터 낭독 허가를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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