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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전쟁의 얼굴을 기록하는 기자들

- '러시아 전범 카탈로그' 만든 우크라이나 야니나 코르니엔코 기자

"전쟁엔 얼굴이 있습니다. 전쟁 전엔 일상 속에 섞여 있는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이제는 각각의 개인이 살인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그들을 찾아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그들이 어떻게 해서 살인자가 된 것인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러시아 전범 지도를 제작해 배포한 우크라이나 언론사 '슬릿스트보 인포 (slidstvo info)' 소속 탐사보도 기자인 야니나 코르니엔코(Yanina Kornienko)의 이야기입니다. 코르니엔코를 포함한 12명의 기자들은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민간인을 살해하거나 성폭행하는 등 각종 폭력을 저지른 군인들의 신상정보를 취합해 대중에 공개했습니다. '전쟁의 얼굴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이었다고 코르니엔코는 강조했습니다.

'슬릿스트보 인포 (slidstvo info)' 소속 탐사보도 기자인 야니나 코르니엔코(Yanina Kornienko)가 2023 글로벌탐사보도총회서 발표를 하고 있다.

"공습으로 인터넷 끊기면 기사는?"…우크라이나 기자들에 쏟아진 질문 세례

지난달 19일부터 나흘간 스웨덴 예테보리에서 열린 <2023 글로벌 탐사보도총회>에 전 세계 132개국에서 총 2천138명의 탐사보도 기자들과 관련 종사자들이 모였습니다. 다양한 주제를 아우르는 100여 개 세션을 통해 탐사보도 저널리즘의 사례와 방법론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졌습니다.

2023 글로벌탐사보도총회 (스웨덴 예테보리)

이번 총회에서 단연 기자들의 관심은 러시아 침공 이후 전쟁의 참상을 취재, 보도하고 있는 우크라이나 기자들이었습니다. 각국 기자들은 러시아의 공습으로 통신망이 끊기면 기사를 어떻게 송고하느냐는 질문부터 시작해 우크라이나를 취재하는 기자들의 안전이 보장되고 있는지와 우크라이나 언론사 탐사보도부의 하루 일과에 대한 질문까지 나왔습니다.
 

모든 기자가 종군기자인 나라, 우크라이나

지난달 20일 글로벌 탐사보도총회에 참석한 코르니엔코 기자는 쏟아지는 질문들에 답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코르니엔코는 "몇 년 동안 기업의 금융 조세 범죄나 정치인이 연루된 각종 권력형 범죄를 취재해오던 일상이 지난해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완전히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매일 다른 사람이 목숨을 잃어나가는 우크라이나에서 원하든 원치 않든 종군기자 아닌 기자는 없었습니다.

코르니엔코 등 다수 기자들은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탐사보도 언론인들의 글로벌 네트워크인 OCCRP(조직 범죄 및 부패 신고 프로젝트)로부터 각종 보호장구를 전달 받았다고 합니다. 러시아 군인과 무기를 식별하는 방법, 사진과 구글 지도 활용법 등 전시에 기자가 알아야 할 내용들에 대해 며칠간 온라인으로 교육을 받은 뒤 본격적인 러시아의 전쟁 범죄 취재에 나섰습니다.
 

피습 지역 찾아가 얼굴 대조…'전범 카탈로그' 제작

러시아 침공 직후 코르니엔코와 팀원들이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우크라이나 영토에서 각종 범죄를 저지른 러시아 군인들에 대한 정보 수집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군과 정보국 등에 포진한 취재원들을 총동원해 러시아 군 관련 자료들을 확보했고 동시에 구글링을 통해 각 군인들에 대한 정보를 '조각 모음' 했습니다. 이들은 'Russian War Criminals'라는 사이트를 만들어 사진과 이름, 계급, 생일, 전화번호와 SNS 주소, 여권 데이터 같은 군인들의 개인정보를 정리해나갔습니다. 일종의 '러시아 전범 카탈로그'를 만든 겁니다. 이들이 제작한 사이트는 전쟁 중 범죄를 저지른 러시아 군인의 정보를 검색할 수 있게 돼있으며, 각 군인들이 저지른 범죄 혐의에 대한 내용 또한 언제든지 제보할 수도 있습니다.

 우크라이나 언론사 슬릿스트보 인포가 제작한 '러시아 전범 카탈로그' 사이트
"우리가 자신들의 신상 정보를 찾을 거라 예상하지 못했는지, 전쟁 발발 직후 몇 달 간은 SNS상에 본인들이 우크라이나 땅에서 저지른 범죄 행위를 그대로 게시하거나 전쟁 상황을 활발히 중계하는 등 각종 정보를 노출한 경우가 많았어요.

공습이 끝나면 우리가 정리해 둔 러시아 군인들의 행적과 함께 이들의 사진을 인쇄해 피습 지역을 찾아갔습니다. 해당 지역의 주민들을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씩 만나며 우리가 프린트해 간 군인들의 사진을 보여주고 어떤 행위를 했는지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어요."

코르니엔코는 "러시아 군인들은 우크라이나 땅에 총알 말고도 여러 흔적을 남기고 갔다"며 "나중을 대비해 누군가는 이들이 남기고 간 범죄의 증거들을 모으고 기록해둬야 한다"고 담담하게 말했습니다.
 

"활동가도 자원봉사자도 아니지만"…'원칙' 버린 이유

"우리는 결코 활동가나 자원봉사자가 아닙니다. 기자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보도하는 사람이라고 배웠고, 일할 때도 그러한 원칙을 잊지 않으려 노력해왔습니다. 전쟁 전까지는요."

발표 일정을 마치고 기자를 따로 만난 코르니엔코가 '원칙'을 언급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코르니엔코의 팀원들은 지난해 10월부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아동 납치 실상을 심층 취재하고 보도해왔습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아동·청소년들을 데려가 러시아 가정에 입양하거나 시설에 수용하는 방식을 통해 친러시아적 사상교육을 하고 이들을 '러시아인'으로 만들려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겉으론 갈 곳 없는 아동들에 대한 구조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우크라이나 땅에 머무르고 싶어 하는 본인과 가족의 의사에 반해 실질적인 납치가 이뤄지는 겁니다.

2023 글로벌 탐사보도총회에서 러시아의 아동 납치 실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야니나 코르니엔코 우크라이나 기자

코르니엔코는 "원래 보호소 등지에서 생활하고 있는 아동 청소년의 경우 제대로 된 절차조차 없이 러시아로 끌려가고, 부모가 있는 아동들의 경우 '건강 관리 캠프(health care camp)'에 보낸다는 명목으로 반강제로 부모의 동의서를 받고 러시아로 데리고 가는 상황"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아동 납치가 자행되고 있는 상황에서 '있는 그대로를 취재해 보도할 뿐 상황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취재 보도의 원칙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는 겁니다.

지난달 20일 2023 글로벌 탐사보도총회서 만난 야니나 코르니엔코 우크라이나 기자
지난달 20일 2023 글로벌 탐사보도총회서 만난 야니나 코르니엔코 우크라이나 기자

러시아로 보내진 아이들, SNS로 찾았다

러시아의 아동 납치는 우크라이나 남부의 미콜라이프 지역에서도 이뤄졌습니다. 지난해 3월 24일 미콜라이프 노보페트리프스케 마을은 러시아에 점령됐는데, 이 마을 내 아동 보호시설엔 15명의 아이들이 남아있었습니다. 점령 석 달째, 물도 떨어져 가던 지하실에서 지내고 있던 아이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남성들에 의해 러시아 군용 차량에 태워져 어디론가 보내졌습니다.
 
"해당 시설에 있던 아이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아야 했어요. 명단을 가지고 각종 SNS에 검색을 하다 보니 18살 짜리 여자 아이 두 명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이 아이들은 헤르손 지역을 거쳐 러시아로 보내졌던 건데, 인스타그램에 우크라이나 국기 사진을 올리는 등 위험한 행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누군지 밝히니 '지금 이런 데 있다, 나가고 싶다'며 당시 머물고 있던 수용시설 내부의 사진과 영상을 보내주더라고요. 환경이 매우 좋지 않아 보였어요. 일단 이 아이들을 여기서 빼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르니엔코 등 취재팀은 우선적으로 우크라이나 정부에 접촉해 이 같은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곧이어 불가능하다는 정부 측 답변이 돌아왔고, 불가피하게도 자신들이 직접 움직일 수밖에 없겠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이후 취재팀 동료 가운데 한 명이 국경지역에 머무르며 아동 구출 활동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에 도움을 청해 이들과 함께 직접 우크라이나 국경을 넘었고, 아이들을 다시 조지아 지역의 시설로 데려왔다고 코르니엔코는 말했습니다.

러시아 아나파 지역 내 시설에 한 달 간 수용됐다가 돌아온 우크라이나 아동들 (사진=Slidstvo Info 사이트)

일부가 아이들을 우크라이나로 데려오는 동안 다른 팀원들은 아이들을 데려간 게 누군지 확인하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코르니엔코 말에 따르면 보호시설에서 아이들을 데려간 남성들은 실제 해당 시설 내 컴퓨터와 CCTV와 종이 문서들까지 고의적으로 훼손하고 갔는데, 취재팀이 데이터가 남아있던 일부 CCTV를 확인해보니 이들은 지난 2021년쯤부터 러시아에 협력하고 있던 헤르손주 전 부지사 측 인물들로 확인됐습니다.

러시아는 "수년간 70만 명에 달하는 어린이들이 총알과 포탄이 난무하는 자국을 떠나 러시아에서 피난처를 찾았다"고 주장하고 나섰습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정부는 올해 초까지 2만 명 가까운 아동, 청소년들이 러시아로 강제이송된 사실을 확인했고, 실제로는 100만 명에 달하는 아동들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러시아로 보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지난달 유엔본부 연설에서 "러시아에 보내진 아이들은 가족과 모든 관계가 끊어진 채 우크라이나를 증오하도록 교육 받고 있다"며 이를 두고 '명백한 인종 말살'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실제 국제형사재판소(ICC)는 지난 3월 아동 납치 혐의로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했지만, 러시아는 혐의 전반을 부인하는 것은 물론 ICC의 사법 관할권과 영장의 효력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점령만으로 끝내지 않을 것"

코르니엔코는 자신과 동료들의 취재 보도한 기사들이 전쟁이 끝난 뒤 푸틴과 러시아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의 증거로 활용될 수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실제 그 가능성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엔 앞서 내비치지 않았던 감정을 꺼내 보였습니다.
 
"사실 좀 겁이 납니다. 다른 나라들이 하나 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줄여나가고,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가 패할까 봐 너무 두렵습니다. 우크라이나가 외국으로부터 지원 받는 무기에 많은 부분 의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간단한 수학 풀이로 가정한다면 러시아가 우리보다 훨씬 크고 인구와 자원 또한 압도적이니까요.

그래서 더더욱 우크라이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떻게든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전쟁에 패한다면 침략자이자 대량학살자인 푸틴이 단순히 우크라이나 점령만으로 멈추진 않을 거라는 것을 더 많은 사람이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국제사회가 모든 러시아 전범들에게 응당한 처분을 내리진 못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이들도 진실을 알게 될 거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이들도 전쟁 전엔 국경을 사이에 두고 비슷한 풍경을 보며 별반 다르지 않은 일상을 살아가던 평범한 사람들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코르니엔코는 말을 맺었습니다.
 
"우리가 지목한 러시아 전범들과 군인들 모두를 처벌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이들은 시간이 흐르며 자신이 한 일을 깨닫게 될 겁니다.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던 단단한 장벽이 무너지면 스스로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실상을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 마음을 끝까지 안고 살아가는 것이 그들에게는 가장 강력한 형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KPF 디플로마-탐사보도 과정'을 통해 현장을 취재했습니다.
※인터뷰 내용 정리에 김창호 인턴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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