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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전쟁이냐, 경제 지원이냐…강대국 이해득실에 밀린 한반도 평화

한국전쟁 휴전협상 과정서 드러난 강대국들의 속셈

[취재파일] 전쟁이냐, 경제 지원이냐…강대국 이해득실에 밀린 한반도 평화
한국전쟁은 조기에 끝날 수도 있었던 전쟁이었습니다. 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했고, 1951년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됐습니다. 협상 초반 군사분계선과 외국군 철군 문제를 둘러싸고 북·중·러 공산 측과 유엔군 등 서방 측 의견이 엇갈렸지만, 공산 측의 양보로 순조롭게 풀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포로 송환 문제를 두고 '전원 송환'을 주장하는 공산 측과 '자유의사에 따른 송환'을 요구한 서방 측이 팽팽히 맞서면서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양측 모두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고, 결국 전쟁은 2년이나 늘어지면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휴전협상 지연 이유'로 알려진 내용입니다.

그런데 최근 학계에서 널리 인정받던 이런 내용에 의구심을 들게 하는 연구 결과가 등장했습니다. 휴전협상이 지연된 주된 이유는 포로 송환 문제가 아니라, 당시 전쟁 당사국들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혔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특히 강대국이었던 중국과 소련의 이해득실 계산이 결정적인 이유였다는 것입니다. 베이징대 한반도연구소 김동길 교수와 김상원 연구원 연구팀은 중국과 소련의 사료를 발굴해 기존과는 다른 해석을 내놨습니다. 북·중·러 세 나라 지도자들 사이 오간 전보와 회의 내용 등을 분석한 결과인데, 어떤 내용인지, 왜 이런 결론을 내린 건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951년 하반기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북한과 중국은 조속한 휴전을 바랐습니다. 포로 송환 문제에서 양보까지 했습니다. 이미 한국 국민으로 편입된 북한 인민군 3만 7천 여 명을 비롯해 상대국에 고향이 있는 포로들의 송환은 요구하지 않겠다며 한 발 물러섰습니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양보까지 했으니 전쟁이 곧 끝나겠구나' 예상했습니다. 이에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냅니다.
 
"지금은 휴전협상이 합의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1952년 4월에 합의에 이를 수 있다면, 11월 중순에는 우리 동료들을 모스크바로 파견해 국방과 국가 경제 건설 관련 기본 건설 5개년 계획 초안을 보고할 예정입니다. 소련 정부에게 전문가 파견, 기술, 장비 및 자재 제공 등의 체계적인 지원을 부탁하며, 대출도 요청드립니다."
(1952년 3월 28일,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중)

사진1 1952년 3월 28일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중
▲ 1952년 3월 28일 마오쩌둥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중 (2021년 교육부-한국학중앙연구원 지원 연구)

중국은 당시 전쟁 종료를 예상하고, 전후 경제 건설을 계획 중이었습니다. 1953년 1차 5개년 계획 본격 시행을 앞두고 당시 강대국이었던 소련의 경제 지원이 절박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애매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나흘 뒤 스탈린으로부터 마오쩌둥에게 온 전보에는 경제에 대한 언급은 전혀 없었습니다. 또 그로부터 일주일 뒤 전보가 왔지만, 스탈린은 "1952년 말까지 16개 사단에 무기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말뿐이었습니다. 경제는 없고 무기만 있는, 그야말로 '전쟁 강행'을 암시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은 오직 한국전쟁을 계속하는 것만이 소련의 지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휴전협상에 대한 태도를 180도 바꿉니다. 마오쩌둥은 1952년 4월 22일 김일성과 중국 측 휴전협상 지휘부에 전보를 보냅니다. "포로 문제에서 강경한 태도를 취하고, 휴전협상을 수개월 연장하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김일성 설득도 병행했습니다.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이런 전보도 보냅니다.
 
"미 제국주의 주요 역량을 동방에 묶어두고 미국의 역량을 계속 손실시켜, 세계 평화의 보루인 소련의 건설을 강화하고 각국 인민혁명운동의 발전에 영향을 끼침으로써 세계대전 발발을 연기시켜야 합니다."
(1952년 7월 15일, 마오쩌둥이 김일성에게 보낸 전보 중)

이 내용은 한국전쟁이 시작될 때 스탈린이 한 말을 그대로 옮겨온 내용이었습니다. 마오쩌둥이 얼마나 스탈린에게 잘 보여주고 싶었는지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마오쩌둥의 결정에 만족한 스탈린은 "마오쩌둥 동지, 우리는 휴전협상을 중단하기로 한 당신의 판단이 완전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칭찬 같은 전보를 보냅니다. 그리고 바로 중국의 수석대표단은 모스크바로 향하고, 딱 한 달 뒤 스탈린은 중국 경제 지원을 약속합니다.

이 과정에서 전쟁 당사자였던 김일성은 속이 탔습니다.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내 '제발 전쟁을 그만하자'고 호소했습니다.
 
"7월 11~12일 사이 미국 공군의 무차별 폭격으로 민간인 6천 명이 죽거나 다쳤습니다. 미국 포로 송환 제안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1952년 7월 16일,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중)

사진2 1952년 7월16일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중
▲ 1952년 7월 16일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 중

하지만 김일성의 이런 부탁은 완전히 묵살됐습니다. 스탈린은 오히려 김일성에게 전보를 보내 "미국의 제안은 '이간책'일 뿐이고, 적의 폭격 압력 때문에 이를 받아들인다면 정치·군사적으로 불리해질 것"이라며 질책했습니다. 결국 전쟁을 끌어야 했던 소련과 경제지원이 우선이었던 중국의 속셈에 전쟁은 끝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내용은 베이징대 연구팀이 소련 해체 이후 공개된 공산당 당안 등 사료들과 중국 측 자료를 수집해 분석한 내용입니다. 물론 학계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포로 송환 문제'를 완전히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휴전협상이 지연된 데에는 포로 송환 외에도 '강대국들의 이해득실 계산'이란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근본적인 이유일 수 있다는 겁니다. 한국전쟁과 휴전협상 과정을 좀 더 다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연구 결과입니다.

냉전의 엄혹한 시기를 지나왔지만, 최근 한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보면 아직 냉전의 서늘한 기운이 맴돌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미일 삼각동맹의 강화와 북한-러시아의 밀착. '신냉전'이라는 용어 등장도 당연해 보일 정도입니다. 내부 정치 상황과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국가들의 모습은 70년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역사는 반복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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