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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망신살' 뻗친 미국 정치? 따져 봐야 할 것들

[월드리포트] '망신살' 뻗친 미국 정치? 따져 봐야 할 것들
지난 화요일 미국의 제118대 하원 의회가 문을 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문만 열었습니다. 의회를 이끌어 갈 의장을 선출하지 못한 탓입니다. 하원 의장은 원내 다수당 후보가 선출되는 게 관례로 사실상 요식행위였지만 이번은 달랐습니다. 100년 만에 첫 투표에서 과반 득표자가 나오지 않은 겁니다. 지난 이틀간 6차례 투표가 진행됐지만 허사였습니다.
 

10%도 안 되는 소수에 발목 잡힌 공화당


공화당은 지난해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탈환했습니다. 다수당이 되긴 했지만 공화당 222명, 212명으로 압승을 거두진 못했습니다. 그 결과, 단 몇 명의 이탈자만 나와도 뜻대로 일을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 됐고 그 약점이 이번 하원 의장 선거에서 고스란히 노출됐습니다. 공화당 주류가 모두 매카시 원내대표를 지지하고 있지만 20명이 매카시에게 표를 던지지 않으면서 하원 전체가 멈춰선 겁니다.

이들은 공화당 내 강경 보수 성향인 '프리덤 코커스' 중에서도 소수파로, 공화당 하원 의원의 9%, 하원 전체로는 4.6% 밖에 되지 않습니다. 공화당 내에서는 애써 탈환한 하원이 계속 공전하자 이들을 향한 비판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온건파는 물론 극우파 평가를 받는 조지아 출신 마저리 테일러 그린 의원도 "매카시 반대 투표를 하는 의원들은 우리가 힘들여서 확보한 공화당 다수의석을 가지고 러시안 룰렛을 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개원 첫 날 의장 선출에 실패하자, 트럼프 전 대통령도 나섰습니다. 트럼프는 현지시간 4일 자신의 소셜 미디어에 글을 올려 "매카시 원내대표와 좋은 대화를 나눴다", "공화당은 위대한 승리를 부끄러운 패배로 바꿔서는 안 된다", "축하할 때이고, 여러분은 자격이 있다. 케빈 매카시는 업무를 잘 해낼 것이고, 큰일을 할 수도 있다"며 지지를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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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 강경 투쟁 위한 '의장 옥죄기'


그렇다면 이들 소수 강경파가 매카시 표를 주는 조건으로 요구하는 건 뭘까요? 사실 보수 강경파들은 전부터 매카시 원내대표에게 하원의장 해임 결의안 제출 기준을 완화하라고 요구해왔습니다. 같은 당 소속인 하원 의장이 바이든 정부와 강경하게 '투쟁'하지 않을 경우 이 카드를 활용해 정치적으로 압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매카시는 당초 이에 대해 부정적이었지만 해임 결의안 제출 기준을 5명으로 낮추겠다는 양보안을 제시했습니다. 이밖에 강경파 의원들이 요구해온 다른 사안도 일부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하원 법사위 내에 '연방정부의 정치적 무기화' 문제를 다루기 위한 특별 소위 구성, 코로나19 특위의 코로나 유래 및 봉쇄 조치 영향 조사 강화, 특정 사업 증액 시 다른 사업 감액 의무화 추진 같은 것들입니다.

미국 공화당 케빈 매카시 원내대표 (왼쪽에서 세번째)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하지만, 반기를 든 20명의 의원들은 여기에 만족할 수 없다며 매카시 지지를 유보했습니다. 이유는 이념적 명분과 개인적 이유 등이 겹쳐 있지만 표면상 가장 큰 이유는 '의장 불신임 투표 요건 간소화'를 들어주지 않았다는 겁니다. 즉, 해임 결의안 제출 기준을 5명 보다 더 낮추라는 겁니다. 또 매카시가 약속한 사항을 어떻게 담보할지, 이행했는지 여부는 어떻게 평가할지 등도 명확히 해야 한다는 입장인 걸로 알려졌습니다. 한마디로 하원 의장이 정치적 재량권을 최대한 차단하겠다는 것으로, 한 현지 언론은 이를 하원 의장으로서 'death warrant'(사형 집행 영장)을 수용하라는 것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제도적 결함? 민주주의 실패?


민주주의 본가를 자부해온 미국의 정치가 소수에게, 그것도 극단적 성향을 가진 몇몇에게 덜미 잡힌 이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번 사태를 두고 "나라를 위해 부끄러운 일"이라며 "당파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의회가 기능하지 못하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인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고도 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사진=AP, 연합뉴스)

물론 민주당 소속인 바이든 대통령의 발언인 만큼 가려 들어야 할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앞서 말씀 드렸듯이 공화당 주류는 물론 강경파에서도 이번 사태에 불만을 쏟아내고 있는 걸 보면 미국 정가에서도 이번 사태를 불편하게 인식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그럼, 이번 사태를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제도적 결함이나 실패로 봐야 할까요?

전에 한 중진 정치인에게 들은 이야기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습니다. "민주주의란 원래 시끄러운 것"이란 말입니다. 서로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합의점을 찾아가는 과정인 만큼 시끄러운 게 당연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입니다. 민주주의는 현대 정치 체제에 근간으로 불리지만, 사실 효율성만 따져본다면 의사결정에 진통이 따르고 그 과정이 결코 빠르지 않은 제도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완벽한 통치자, 즉 플라톤 말한 '철인왕' 같은 사람이 나올 수 없는 점을 감안하면 민주주의 그 이상의 제도를 기대하긴 어렵습니다.
 

합의 도출은 다수파의 책임


다시 돌아가서, 현재 미국의 상황은 어떻게 봐야 할까요? 소수라고 하지만 그들 역시 국민의 대표이고 보면 그들과 뭔가 합의점을 찾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건 그건 다수파의 지지를 받고 있는 매카시 원내대표의 몫이 아닐까 합니다. 합의점을 도출해내야 할 책임은 주도권을 쥔 쪽에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소수에 의해 의사결정이 왜곡되는 폐해는 분명히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것도 민주주의가 안고 가야 할 가진 제도적 숙명인지 모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비슷한 경우가 종종 발생합니다. 그때마다 극한 대립이 벌어지고 지지층 간 대립으로 확대되기도 합니다. SNS에 상호 비방이 넘쳐나고 문자 폭탄이 쏟아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치의 본질이 갈등을 키우는 게 아니라 갈등을 조정하는 것이고 보면, 우리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분명합니다. 미국은 남북 전쟁 직전인 1855년, 의회 내 분열로 두 달간 133번의 투표 끝에 하원 의장 당선자를 결정했다고 합니다. 완벽한 제도란 없고 그 한계를 극복해내는 건 그 나라 국민과 정치인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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