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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1만5천 공무원' 세종시…3·1절 태극기는 보이지 않았다

"못 달았어요. 솔직히 말하긴 했는데, 뉴스에 나올까 봐 약간 겁은 나네요."
 
세종시에 살고 있는 모 정부 부처 공무원의 말입니다. '어제 혹시 집에 태극기 달았느냐'는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다 대답했습니다. 부부가 공무원인 다른 부처 공무원을 포함해 2일 오전, 같은 질문을 던진 공무원 5명 모두 3·1절 태극기 게양을 하지 않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고백을 하자면 저도 지난해 말 세종시에 오기 전까지 3·1절이나 광복절 등 국경일에 집 앞에 태극기를 걸어놓은 적이 없었습니다. 태극기도 없었고, 게양대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사를 하면서 회사 사택인 아파트의 신발장 안쪽에서 태극기를 봤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베란다 바깥쪽에 게양대가 있는 것까지 확인하고 제법 경건하게 게양을 했습니다.

▲ 조기호 기자가 3·1절인 어제, 직접 촬영한 영상

바람에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면서 자연스레 건너편 아파트 단지에 눈길이 갔습니다. 그런데 집집마다 태극기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대편 아파트 단지도 살펴봤습니다. 비슷했습니다. 관사를 중심으로 사방이 아파트 숲인데 주위를 둘러봐도 태극기가 펄럭이는 곳은 정말 가뭄에 콩 나는 듯했습니다. 의아했습니다. 제가 있는 아파트를 비롯해 세종시의 아파트 곳곳에는 정부부처 공무원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말이죠. 국무조정실에 따르면 세종청사 등 입주부처 공무원은 2020년 4월 기준, 14,664명입니다. 이들 중에 90%가 세종, 공주 등 세종권에 거주하고 있고요. 여기에 세종시청 공무원 2천여 명을 합해서 따져보면 세종 인구의 5%가 공무원입니다. 서울과 경기가 1%, 충남이 2%인 점을 감안하면 '세종은 공무원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취재파일]'1만5천 공무원' 세종시…3.1절 태극기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지역의 경우 옆집에 공무원이 사는지 모르는 곳이 많아 태극기를 게양 안(못) 해도 눈치 볼 일 없을 겁니다. 하지만 세종은 조금 과장해서 두 집 건너 한 집이 공무원이라는 걸 서로 잘 알고 있을 것 같은데 이렇게 집단적으로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상황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지 당황스러운 건 사실입니다.

▲ 조기호 기자가 3·1절인 어제, 직접 촬영한 영상

물론 공무원이라고 국경일에 태극기를 꼭 게양해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옛날에야 국경일마다 장·차관 집에 태극기가 걸려 있는지 확인해서 기사를 쓰기도 했지만 요즘에는 이런 기사 안 나옵니다. 불법도 아닌데 <태극기 미게양=애국심 부재>라고 손가락질 할 정도로 우리 국민의 의식 수준이 퇴행적이지는 않아서일 겁니다. 애국심은 국가가 주입하는 게 아닙니다. 각자 스스로 발현하는 것, 그게 더 단단한 애국심이라는 데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럼에도 세종시의 3·1절 풍경에서 씁쓸한 느낌은 지울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행사장에서 발광 화면을 통해 태극기를 보여줄 때도 실물 국기를 반드시 게양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스크린에서 나타났다 사라지는 실체 없는 태극기는 태극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작 국경일에 태극기를 걸어놓지 않고 '그래도 태극기 게양할 마음만은 늘 충만했다'는 것과 다를 게 없다는 뜻이겠죠.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았다고 공무원을 비난할 수는 없지만 태극기 게양 문제에 공무원들마저 일반 국민들처럼 둔감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스러울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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