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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페셜리스트] 살인범의 이름도 부르지 못하는 언론…이유는?

안전한 익명 보도는 이제 그만…관성적인 행태 바로잡아야

안녕하세요. SBS 법조팀 임찬종 기자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언론사들이 흉악범 얼굴도 공개를 잘 못하는 이유를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기자 생활하는 내내 답답하게 느끼고 있는 부분이기도 해요.
 

범죄자 공개 회피하는 언론…수사기관 방침만 따라야 될까

얼마 전에 송파구 신변 보호자 가족 피살 사건 피의자인 25살 남성 이석준의 신상이 공개됐습니다. 이 사람이죠.

그런데 경찰이 위원회를 열어서 신상 정보를 공개하겠다고 결정하기 전까지는 대부분의 언론사가 이석준의 실명이나 얼굴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공개하기 전까지는 언론사들이 이석준의 실명이나 얼굴을 몰랐을까요? 그렇지는 않았겠죠. 알면서도 안 쓴 겁니다. 그런데 이번 경우만 그런 게 아니죠.

이른바 'n번방 사건'과 관련해서 유명한 조주빈이라는 사람이 있죠. 이 조주빈 실명도 언론사들이 다 알고 있었지만 경찰이 신상정보 공개를 결정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얼굴 사진이나 실명을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유일하게 SBS가 경찰이 공개하기 전에 독자적인 판단으로 조주빈의 실명을 보도한 적이 있죠.
 

"한국 범죄자는 이름이 없다?"…외국에선 익숙한 '실명 공개'

그런데 이런 일은 좀 큰 강력 사건이 터질 때마다 반복이 됩니다. 사실 강력 사건뿐만이 아니죠. 어지간히 이름이 알려진 공인이 아니면 우리나라에선 범죄자의 실명이나 얼굴을 언론이 보도하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김 모 씨, 이 모 씨, A씨, B씨 이렇게 쓰죠.

그런데 이게 참 곤란한 경우가 있어요. 그러니까 예컨대 지금 김 모 씨, 이 모 씨 이렇게 얘기를 했잖아요. 그런데 사건에 따라서는 이 씨가 두 명 나오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러면 이 모 씨, 이 모 씨 이렇게 쓰면 헷갈리잖아요. 그럼 결국 A씨, B씨 이렇게 쓰는데 그럼 또 문제가 되는 경우가 둘 다 사실은 이 씨인데 A씨하고 B씨의 성씨가 다른 것처럼 또 읽히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A씨와 B씨는 성이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표기를 할 수는 없잖아요. 상당히 좀 그러니까 익명 보도를 하려다 보니 좀 어색한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그런데 외국도 그럴까요. 아닙니다. 나라마다 다 똑같지는 않지만, 미국이나 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살인 피의자든 사기 피의자든 웬만하면 실명을 보도합니다. 가끔 우리나라 뉴스에서 해외에서 벌어진 범죄 사건 보도할 때 피의자들 이름이 그대로 나오잖아요. 그 나라에서 언론이 실명을 보도하니까 가능한 거죠.
 

얼굴까지 공개했던 1986년 '서진 룸살롱 사건'…그때는 왜?

생각을 해보십시오. 우리나라 기자가 그 나라 언론이 보도를 안 하는데 혼자 거기 현장에 가서 그 나라 언론사들도 모르는 범죄자 실명을 취재에서 보도하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그럼 우리나라 언론사들은 왜 신상 정보 보도, 실명 보도를 안 하는 걸까요?

그런데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1990년대 중반 정도까지는 범죄 피의자의 얼굴이나 실명을 그대로 보도했었다는 겁니다.

1980년대에 조폭끼리 싸우다 벌어진 살인 사건이 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사건인 '서진 룸살롱 사건'을 보도한 기사를 보세요.

1986년 8월 20일자 경향신문을 찾아보세요. 한자가 좀 있긴 한데요. 2년 전부터 폭력 살인 훈련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습니다. 이 기사를 보면 '서진 룸살롱 사건' 가해자와 피해자들 실명이 한자까지 다 나와 있습니다. 다른 사건 기사들 찾아보면 주소가 나와 있는 기사도 있어요.

예전에는 범죄를 보도할 때 우리나라 언론사도 실명 보도를 원칙으로 했던 겁니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나라 언론사들은 김 모 씨, 이 모 씨 이렇게 하면서 익명 보도를 원칙으로 하게 된 걸까요.
 

대법 "범죄자 신원까지 알릴 필요는 없다"…익명 보도의 출발

언론사들이 어느 날 다 한자리에 모여서 '자 이제부터 우리는 실명은 쓰지 말자' 이렇게 도원 결의를 한 건 아니니까 정확한 시점을 잡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언론학자들 그리고 오래된 기자들에게 물어보면 1998년에 선고된 대법원 판결이 계기가 됐다고 말을 합니다.

1990년에 서울 서초경찰서가 남편 친구 등에 대한 폭행을 청부한 혐의로 한 여성을 구속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당시에는 얼굴을 공개해서 보도하는 게 기본이었으니까 이 여성의 신상을 언론이 보도했죠.

그런데 이 여성이 나중에 재판에서 무죄를 받았어요. 그러고 나서 자신의 얼굴을 보도한 기자 그리고 언론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언론사들은 우리가 이 사람이 범죄 혐의가 확정됐다고 보도한 게 아니라 범죄 혐의로 수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한 것인데 이것에 대해서까지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면 어떻게 하느냐 이렇게 항변을 했습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대법원은 이 여성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여기서 대법원이 아주 중요한 기준을 제시합니다.

범죄 사건 내용에 대한 보도 자체는 공공성이 있지만 범죄 혐의자의 신원을 알리는 보도는 공공성이 없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범죄 사건 내용을 보도하는 거는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가 지금 이런 상황이라는 걸 알려주고 또 범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서 여론 형성을 하는 이런 공익적 기능이 있지만 이를 위해서 꼭 범죄자의 신원까지 알릴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래서 언론사들이 이 소송에 져서 그 여성한테 거액을 물어줘야 했습니다. 그 이후부터 우리나라 언론사에서는 공인이 아닌 범죄 혐의자의 실명이나 얼굴을 원칙적으로 보도하지 않는 것, '익명 보도 원칙'이 자리 잡게 된 겁니다.
 

'안전한 익명 보도' 선택해 온 관행…실명 보도 범위 재논의 필요

물론 이 판결이 의미가 있어요. 범죄 피의자라고 일단 보도가 되면 나중에 무죄를 받는다고 해도 무죄 받은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는 경우가 많으니까 피해를 받는 경우가 꽤 있죠. 그러니까 이 판결이 무조건 이상하다 이렇게 말을 하긴 어렵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원칙 때문에 우리나라 언론사들이 실명을 보도해도 되거나 실명 보도를 하는 것이 오히려 공익에 부합하는 경우에도 안전하게 익명 보도를 선택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겁니다.

처음에 예를 든 살인 사건들의 경우를 보세요. 경찰이 실명을 공개하고 나서는 언론사들이 다 따라서 실명 보도를 하잖아요?

이런 경우는 어떻게 보면 경찰이 공개하기 전에 언론사 스스로 실명 공개에 따른 공익이 있다고 판단했다면 공개하는 게 맞는 거죠.

거대 기업이나 권력자를 비판하는 보도의 경우 보통 이런 사람들은 공인으로 분류되는 경우가 많은데도 또 공인의 기준이라는 게 딱 명확하지가 않거든요. 부담스러우니까 일단 안전하게 익명 보도를 선택하는 경우도 꽤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실명 보도가 꼭 필요한데 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우리나라 법원이 앞으로 새로운 판례를 좀 내서 실명 보도의 범위를 좀 더 넓혀줬으면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관성적 익명 보도는 그만"…위험 무릅쓰고 실명 보도할 때 있어야

하지만, 판례가 바뀌기 전이라도 언론사 스스로 어떤 경우에는 익명 보도가 필요하고 어떤 경우에는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실명 보도를 꼭 해야 하는지 명확한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에는 좀 만만한 사람은 실명 보도를 하고 또 보도를 했다가 좀 힘들어질 것 같으면 안전하게 무조건 익명 보도하고 이런 경우가 왕왕 벌어질 테니까요.

그러니까 무엇보다 필요한 건 다 알면서도 리스크가 있으니까 익명 보도로 도망치는 태도, 국가기관이 허락하기 전까지는 관성적으로 익명으로 보도하는 경향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저도 기사 쓸 때 이런 기준을 다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앞으로는 더욱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다음 기회에 또 뵙겠습니다.

(촬영 : 조창현·이승환 / 편집 : 차희주 / 기획·제작 : SBS D콘텐츠기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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