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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장정구와 이용구, 공정함이란 무엇인가

장정구 씨는 1980년대를 풍미한 복싱 세계챔피언이었다. 1983년 WBC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후 15차 방어까지 성공했다. 2009년에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국제 복싱 명예의 전당(IBHOF)에 헌액되기도 했다. '레전드'라고 불러도 지나침이 없는 위대한 복서다. 그러나 전설적인 챔피언도 법의 잣대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장정구 씨는 2021년 8월 20일 밤 서울 강남구 선릉역 인근에 있던 택시 안에서 택시기사를 폭행한 혐의로 경찰에 입건됐다. SBS 취재진이 입수한 택시 블랙박스 영상에는 당시 장 씨의 폭행 장면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장정구 택시기사 폭행

술에 취해 택시 뒷좌석에서 잠을 자고 있던 장정구 씨는 택시기사가 잠을 깨우자 "혼나야겠네, 서비스가 뭐요"라며 말다툼을 벌였다. 그러다가 장 씨는 택시기사의 얼굴과 머리를 손과 휴대전화로 몇 차례 때렸다. 택시기사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장 씨를 곧바로 입건했다. 특정범죄가중처벌법(특가법)의 운전 중 운전자 폭행 혐의였다. 택시에 시동이 걸려 있었기 때문에 운전 중인 상태로 본 것이라고 경찰 관계자는 설명했다. 장 씨는 다음날 SBS 취재진과의 통화에서 "당시 술에 취해 있어서 전혀 기억이 안 난다."라면서도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라고 사과의 뜻을 밝혔다.

이용구

그런데 얼마 전 장정구 씨의 경우와 꼭 닮은 사건이 있었다. 이용구 전 법무부 차관의 택시기사 폭행 사건이다. 2020년 11월 6일, 법무부 법무실장을 마치고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던 이용구 씨는 서울 서초구의 한 아파트 단지 인근에 있던 택시 안에서 택시기사를 폭행했다. 장정구 씨와 마찬가지로 택시 뒷좌석에서 술에 취해 자고 있다가 택시기사가 잠을 깨우자 벌인 일이었다. 장정구 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용구 변호사가 타고 있던 택시도 시동이 걸려있던 상태였다.

하지만 이용구 전 차관 사건은 장정구 전 세계챔피언 사건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 장정구 씨는 곧바로 특가법상 운전 중 운전자 폭행혐의로 입건됐지만, 이용구 전 차관에게는 운전 중 운전자 폭행 혐의가 (언론보도가 나오기 전까지는) 적용되지 않았다. 언론보도가 나오기 전까지는 아예 형사입건조차 되지 않았다. 이용구 전 차관은 경찰 사건 발생 당일에도, 다음 날에도 입건되지 않은 채로 있다가 택시기사와 합의를 봤고, 택시기사가 처벌불원 의사를 밝히자 경찰은 이용구 전 차관을 입건하지 않고 내사종결 처리했다. 쉽게 말해, 형사적으로는 없던 일로 해줬던 것이다.

한국 복싱의 '레전드'는 시동이 꺼지지 않은 택시 안에서 택시기사를 폭행하자 특가법상 운전자 폭행 혐의로 곧바로 형사입건됐다. 하지만 현 정부에서 법무부 법무실장을 지냈고 한때 공수처장 후보로 거론됐으며, 사건 발생 당시 월성원전 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의 변호인을 맡고 있던 법조인은 시동이 꺼지지 않은 택시 안에서 택시기사를 폭행했지만 입건되지 않았다. 피해자와 합의를 보더라도 처벌을 피할 수 없는 특가법상 운전자 폭행 혐의도 적용되지 않았다. 오히려 얼마 지나지 않아 법무부 차관으로 임명됐다. (차관 취임 이후 언론에서 이용구 전 차관의 택시기사 폭행 사실과 내사종결 관련 의혹을 제기하자 검찰과 경찰은 이 사건을 다시 수사했다.)

장정구 전 세계챔피언 사건은 서울강남경찰서에서 수사를 하고 있다.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경찰이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 송치할 것이다. 통상적인 사건 처리 방식이다. 이용구 전 차관 사건은 서울서초경찰서에서 지난해 11월 한 차례 내사종결했다가, 지난해 12월 보도가 나오자 증거인멸 의혹 등에 대해 다시 수사를 해서 올해 7월에야 검찰에 사건을 송치했다. 언론보도 직후인 지난해 12월 고발장을 접수해 이용구 전 차관의 운전자 폭행 혐의 등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은 아직도 기소 여부를 결정하지 않고 있다.

장정구-이용구

똑같이 술에 취해서, 시동이 걸려 있는 택시 안에서, 택시기사를 폭행했지만, 복싱계의 '레전드'는 곧바로 형사입건되고, 법무부와 정권의 '핵심'은 입건되지 않았다가 문제를 제기하는 언론 보도 이후에도 여덟 달 넘도록 기소되지 않는 상황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검찰개혁과 경찰개혁의 핵심은 결국 수사권과 기소권의 공정한 행사다. 공정함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는 지금의 상황이 '개혁'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개혁'이 원래의 목적을 너무나 정확하게 달성했기 때문인지는 시간이 지나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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