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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정치적이지 않은 인권과 검찰 과거사위

[취재파일] 정치적이지 않은 인권과 검찰 과거사위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으로 유명해진 박준영 변호사는 흔히 형사사건 재심 전문 변호사라고 불린다. 정치적인 이슈가 되지 않아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한 이른바 '일반 형사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을 위해 여러 차례 재심을 청구했기 때문이다. 약촌 오거리 사건 외에도 '무기수 김신혜 재심 사건', '삼례 나라슈퍼 사건', '낙동강변 2인조 살인 사건' 등 여러 재심 사건이 박 변호사의 손을 거쳐 갔다.

● '재심 전문 변호사'와 '인권 변호사'의 차이?

하지만 박 변호사에게 인권 변호사라는 호칭은 상대적으로 낯설다. 우리 사회에서 그동안 인권 변호사의 일이라고 여겨져 왔던 정치권력에 대항한 사건이나, 회사나 대주주에 맞선 노동사건과는 궤를 달리하는 사건들을 박 변호사가 주로 맡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사건이나 노동 사건이라는 범주조차 제대로 부여받지 못하고 '일반 형사사건'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는, 주목받지 못하고 힘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사건을 박 변호사는 도맡아왔다.

그런 박준영 변호사가 최근 페이스북에 격한 감정을 토로하는 글을 올렸다. 지난 12일 출범한 법무부 검찰 과거사 위원회가 1차 조사 대상으로 25개 사건을 선정했다는 언론 보도 때문이다. MBC 뉴스는 지난 15일 '정연주 전 KBS 사장 배임 혐의 기소', 'PD수첩 사건', '약촌오거리 사건', '유우성 씨 간첩 조작 사건', '국정원 여직원 감금 혐의 사건'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불기소 결정', '고 백남기 농민 사망 사건 늑장 수사'. '국정원 직원 좌익효수 사건' 등이 25개 사건 명단에 포함됐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박 변호사는 아래 같은 글을 남겼다.

● 박준영 변호사의 격정 토로

"대통령 풍자 포스터 사건, 김상곤 교육감, 안도현 시인 사건도 들어갔습니다. 이들 사건이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진범이 자백을 했는데도 검사는 진범을 풀어줬고, 지적장애인 등 사회적 약자 세 사람을 억울하게 옥살이시킨 사건이 삼례 나라슈퍼 사건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인권침해사건입니다.

과거사위원회 위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제가 진행한 사건들이 조사대상이 될 수 있어 포기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위원회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후회됩니다. 이달 말 조사대상을 최종 선정한다고 합니다. 검찰 과거사위원회 1차 조사대상 25건에 ‘약촌오거리 사건’이 들어갔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삼례 나라슈퍼 사건이 조사대상에서 빠져 있습니다. 달리 취급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도 말입니다. 이달 말 최종선정을 한다고 해도 1차 조사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이유를 납득할 수 없습니다." (박준영 변호사가 페이스북에 쓴 글 중 일부)
영화 '재심'의 주인공 박준영 변호사가 지난 8월 8일 오후 충남지방경찰청 대회의실에서 형사들을 상대로 경찰의 인권침해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 "정치적이지 않은 사건에 연루된 사람의 인권도 소중"

박 변호사의 주장은 간명하다.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된 사람의 인권 못지않게 정치적이지 않아서 주목받지 못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의 인권도 중요하며, 더구나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된 바 있는 '삼례 나라슈퍼 사건'이나 '낙동강변 살인 사건'의 경우 배제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낙동강변 살인 사건'은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에 관여한 적이 있어서 더욱 화제가 된 사건이기도 하다.)

물론 법무부는 MBC보도 직후 곧바로 "오보"라며 "앞으로 조사 대상 사건 계획 등을 논의하여 추후 사건을 선정할 계획으로 현재는 선정, 확정된 사건이 전혀 없다"는 공식입장을 밝혔다. 박 변호사도 페이스북 글을 올린 뒤 믿을 수 있는 검찰 과거사위원회 관계자로부터 해당 보도가 오보라는 설명을 들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포스팅을 내릴까 하다가 '우려'는 남길 필요가 있어"서 글을 그대로 두겠다고 박 변호사는 밝혔다.

실제로 확인 취재 결과 문제의 보도가 아무 근거 없이 나온 것은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12일에 열린 검찰 과거사위원회 첫 회의에서 기사에 언급된 25개 사건이 실제로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법무부 산하 검찰 과거사 위원회 출범 직후 열린 대검 산하 검찰개혁위원회 회의에서도 논의 자료로 25개 사건이 기록된 리스트가 배포됐다. 1차 조사 대상 사건 25건이 선정됐다는 기사는 정확한 보도가 아니었지만, 적어도 문제의 25건이 유력한 조사 대상 후보로 검토된 것은 사실이었다. (**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해당 보도를 전적으로 '오보'라고 규정할지, 아니면 부정확한 면이 있지만 사실의 일부를 담은 보도였다고 볼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겨두겠다.)

박준영 변호사에게 인권 변호사라고 부르는 것이 어딘가 어색하게 들리듯이, 그가 맡은 '일반 형사사건'들을 '인권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다. 바로 그 어색함과 낯섦이 어쩌면 우리 사회가 인권이란 단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선입견을 반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인 쟁점이 되지 않아서 그동안 누구도 제대로 살피지 않았던 사람들의 인권 침해 사건이야말로 국가 기관이 정식으로 출범시킨 검찰 과거사위가 더욱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살펴야 할 분야일 수 있다. 검찰 과거사위원회가 발표한 조사 대상 선정을 위한 3가지 기준에 비춰보면 더욱 그렇다. (조사 대상 선정 기준 1. 재심 등 법원의 판결로 무죄가 확정된 사건 중 검찰권 남용 의혹이 제기된 사건 2. 검찰권 행사 과정에서 인권침해 의혹이 제기된 사건 3. 국가기관에 의한 인권침해 의혹이 상당함에도 검찰이 수사 및 공소제기를 거부하거나 현저히 지연시킨 사건들 중 위원회 의결로 선정)
박상기 법무부 장관
● 검찰이 반성해야 할 것은 '정치'만이 아니다

박준영 변호사는 자신이 맡았던 '일반 형사사건' 가운데 '약촌 오거리 사건', '삼례 나라슈퍼 사건', '낙동강변 2인조 살인 사건'을 조사 대상으로 선정해달라는 제안서를 검찰 과거사위원회에 보낼 계획이라고 한다.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되고 당사자들이 억울하게 무기징역 등 중형을 선고받은 이 3가지 '일반 형사사건'마저 조사 대상에서 빠진다면, 도대체 또 어떤 사건에 대해 검찰권이 남용됐고 시민의 인권이 침해됐다고 규정할 수 있는지 의문이라고 박 변호사는 말한다.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검찰 과거사 위원회의 출범 목적과 관련해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서 법무·검찰 스스로 과거의 잘못을 찾아내 진실을 규명하고 이에 대한 진정한 반성을 통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밝혔다.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반성해야 할 것은 검찰의 정치적인 과거뿐만이 아니다. 검찰 과거사위가 조사 대상 최종 선정에 앞서 정치적이지 않아 주목받지 못한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인권침해에도 한 번 더 관심을 기울여주기를 바란다.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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