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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교민살해와 치안 한류…그리고 경찰의 조급함

[취재파일] 교민살해와 치안 한류…그리고 경찰의 조급함
지난 달 22일 필리핀 마닐라 외곽에 거주하는 60대 한국인 남성이 목과 가슴 등 여러 곳을 흉기에 찔려 사망한 채로 발견됐다. 지방대 교수생활을 하다 7년 전 혼자 필리핀으로 건너간 이 남성의 살인사건을 두고 필리핀 경찰은 한국 경찰에 수사 공조를 요청했다.

경찰은 다음 날 현장감식, 범죄분석 등 4개 분야의 전문경찰 1명씩 모두 4명을 필리핀으로 급파했다. 그리고 우리 경찰은 사건 발생 나흘 만인 26일 용의자를 특정해 필리핀 경찰에 제시했다. 경찰이 지목한 용의자는 10대 후반의 가정부 A씨였다.

● "4일 만에 살해범 검거 사례 남겼다"
강신명 경찰청장
강신명 경찰청장은 지난 달 29일 기자 간담회에서 "사건 자체가 어렵지 않았다"며 "올해 들어 필리핀 교민 살해범 검거 사례를 남겼다"며 자랑 아닌 자랑을 했다. 그 날 오후 경찰은 백브리핑(공식적 자리 뒤에 출처를 밝히지 않는 전제로 기자들에게 관계자가 설명하는 형식)을 자처했다.

우선 경찰은 A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꼽은 이유로 피해자가 마을 출입구를 따로 두고 그 안에 수 백 가구가 거주하는 빌리지 형태로 살고 있었는데, 사망 추정 시간에 A씨가 빌리지 안에 있었다는 점을 들었다. 6시간짜리 분량의 CCTV 4개를 돌려 분석해 본 결과라는 것이다.

또한 사건 당일 오전 A씨를 만난 동네사람들을 면담해 현장을 재구성해 본 결과, 용의자는 면식범일 가능성이 있고, 피해자는 담배를 아예 피지 않았는데 담배꽁초가 화단에 떨어져 있었다는 점도 A씨의 범행을 입증할 증거라고 했다. 경찰은 피해자의 집에 있는 컴퓨터를 이용해 A씨가 자신의 SNS 계정에 접속했다며 이 점 또한 A씨가 용의자임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라고 설명했다.

● 어색한 분위기의 백브리핑

하지만 기자들은 브리핑이 진행 될수록 사건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이해되기보다는 의구심만 더해가는 듯 했다. ‘지문이 있느냐’는 질문에 경찰은 "현지 경찰이 확인중"이라며 확실히 답하지 못했고, A씨가 피해자 사망 추정 시간에 빌리지 안에 있었다는 것은 확인했지만 피해자의 집에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지 못했다.

증거물로 확보한 담배꽁초에 대해서도 질문이 나왔지만 경찰은 A씨가 흡연자인지, 비흡연자인지도 모르고 있었고, A씨가 피해자 집에 있는 컴퓨터로 SNS 계정에 접속했다는 날짜도 사건 당일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이 정도 수사해서 기소가 가능하겠냐는 질문까지 나왔다. 결국 그 다지 명쾌하지 않은 분위기에서 어색하게 브리핑은 끝났다.

● 조급해 할 필요 있나
우리 경찰이 짧은 시간 안에 능력을 발휘한 수사 성과를 폄하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한국 경찰이 지목한 용의자가 실제 범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고, 그럴 가능성도 매우 높아 보인다. 하지만 우리 경찰도 브리핑 때 말했듯 용의자를 지목해 필리핀 경찰에 알려줬다고 해서, 사건이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 나머지 본 수사는 현지 경찰의 몫으로 지문, 용의자 조사 모두 현지에서 담당해야 하는 일이다. 우리 경찰이 필리핀 현지에서 수행한 성과물에 현지 경찰의 수사가 더해져야 범행의 윤곽이 드러나는 상황인 것이다.

앞서 경찰은 지난해 12월에도 필리핀에 과학수사요원을 보낸 바 있다. 경찰청은 당시 교민 살인사건에 대한 과학감식 등 지원차원이라면서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타국의 주권이 엄연히 있는 만큼 우리 경찰은 수사 지원이나 자문 정도에 응해주는 것이라며 언론에 '수사' 라는 표현도 조심히 써 달라는 부탁할 정도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A씨는 실제로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경찰에서 국외에서 단기간에 이뤄낸 성과를 자랑하고도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해외에서 수사 주체도 아닌 지원 작업에 참여해 용의자를 지목했다고 해서 ‘외국에서 사건 발생 4일 만에 살인 용의자를 특정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경우’, ‘치안한류의 확산’ 등으로 자화자찬하는 것은 낯 뜨겁다.

도리어 현지 경찰이 용의자를 잡을 수 있도록 우리의 과학수사 역량으로 충분히 백업해 주고, 다소 시간이 지났더라도 현지 수사 결과가 어느 정도 나온 뒤 언론에게 차분히 설명했다면 어땠을까. 점잖게 타국 수사기관에 대한 예우도 갖추면서 우리 경찰의 수사 능력을 보다 더 인정받을 수 있는, 그야말로 '치안 한류'를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을 것이다. 적어도 그날 브리핑 때만큼의 분위기는 연출되지 않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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