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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유승민의 '헌법 1조', 영화 변호인의 '헌법 1조'

[취재파일] 유승민의 '헌법 1조', 영화 변호인의 '헌법 1조'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사퇴했습니다. 사퇴의 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길지도 화려하지도 격정적이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할 말은 다했더군요. 그 중에서도 대한민국 헌법 제1조 1항을 얘기한 부분에 눈길이 절로 갔습니다.

“평소 같았으면 진작 던졌을 원내대표 자리를 끝내 던지지 않았던 것은 제가 지키고 싶었던 가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법과 원칙, 그리고 정의입니다. 저의 정치생명을 걸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임을 천명한 우리 헌법 1조 1항의 지엄한 가치를 지키고 싶었습니다. 오늘이 다소 혼란스럽고 불편하더라도 누군가는 그 가치에 매달리고 지켜내야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했습니다.”
 
법과 원칙 정의라는 말은 정치인이라면, 정치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항상 하는 말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법과 원칙, 정의를 국정의 기본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 올해 상반기 부정부패 척결을 얘기할 때도 법과 원칙, 정의를 강조 했습니다.

거기에 하나 더 추가한 것이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1조였습니다. 유승민 원내대표가 누구를 향해 이런 얘기를 했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유승민 원내대표의 사퇴의 변을 생중계로 지켜보면서 헌법 1조를 얘기하는 그 긴박한 순간 제 머릿속에는 영화 변호인의 하이라이트 부분이 떠올랐습니다. 저만 그런 것은 아닐 듯도 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연기한 배우 송강호 씨가 대학생을 잡아다가 모진 고문을 한 경찰관을 향해서 이렇게 얘기합니다.

“(변호사란 사람이 국가가 뭔줄 몰라?) 압니다. 너무 잘 알죠. 대한민국 헌법 제 1조 2항.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1항과 2항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유승민 원내대표와 영화 속 변호인은 모두 헌법 제 1조를 말했습니다.
 
영화 속의 변호인은 정권 유지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군사정권과 그 하수인들에 맞서는 정의로운 사람으로 그려졌습니다. 마지막 법정 장면은 그렇게 영화를 본 사람들의 머리와 가슴에 각인됐죠.
 
유승민 원내대표가 굳이 헌법을 꺼내 들고 나온 것도 결국 그런 효과를 염두에 뒀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나는 헌법을 지키려 애썼다. 이런 식으로 여당 원내대표가 청와대 한 마디에 그만둬야 하는 상황은 헌법에도, 법과 원칙, 정의에도 맞지 않는다. 나를 뽑아준 사람들은 여당 의원들이니만큼, 그만두게 할 사람도 결국은 그들이다.”

동시에 법과 원칙, 정의라는 박대통령이 즐겨 사용하는 단어를 통해서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하고 ‘배신 정치 심판론’으로 자신의 사퇴를 압박한 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한 수도 노린 것 같습니다. 미국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 출신의 엘리트다운 글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물론, “유승민, 당신만 법과 원칙, 정의를 지키는 정치인이냐?”는 비난도 나오고 있습니다. 상대를 포용하기 보다는 배척하고 무시하는 유승민류 정치의 한계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기자로서 유승민 원내대표를 처음 만난 것은 2002년 대선 전이었습니다. 대선을 앞둔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가 인재영입차원에서 영입해 여의도연구소 소장을 맡겼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방으로 찾아가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었습니다. 경제학 박사라는 이미지와 달리 사안마다 거침없이 얘기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이후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는 자주 볼 기회는 없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지난해 말 원내대표 출마를 준비하던 때 만나서 속깊은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애정을 얘기했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원내대표 직을 넘어 그 다음 정치행보에 대한 의지와 꿈도 내비쳤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박근혜 대통령은 2002년 대선 전에 이회창 총재의 독선적 당 운영을 비판하며 한나라당을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탈당했다가 대선 직전 다시 복당한 적이 있습니다. 보수를 대변하는 한나라당의 대선 승리를 위해 등을 돌렸던 이회창 총재와 다시 손을 잡았던 것이죠.

그 해 대선이 끝난 뒤 박 대통령은 차떼기 당이라는 오명을 받으며 난파선이 되다시피 한 한나라당을 이끌며 탄핵 역풍을 뚫고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에 기적 같은 121석을 안겼습니다. 오늘의 대통령 박근혜를 만든 리더십의 시발점이기도 합니다. 선거의 여왕이라는 찬사도 얻었습니다.
 
많이들 아는 얘기지만 유승민 원내대표는 한 때 누구보다 친박근혜였지만, 한 때는 누구보다 친박계와 멀리 갔다가 지난 2월 원내대표 경선을 기점으로 다시 돌아와 친박계의 거울 앞에 섰다는 평가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를 계기로 박 대통령과 친박계와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습니다. 당장 내년 4월 총선 때 공천이나 받을 수 있겠느냐는 얘기도 여당 안에서 나오고 있지만, 친박계의 희망일 뿐이라는 목소리가 더 큽니다. 대통령과 맞서면서 상처도 많이 받았지만, 일약 차기 대선주자 반열에 올라선 대구경북의 정치인을 지역 유권자들이 그렇게 홀대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얘기죠.

명연설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다, 진영을 넘어 미래를 위한 합의의 정치를 하자”는 지난 4월 국회 연설도 앞으로 유승민의 정치 행보마다 따라 다니면서 때로는 플러스가, 때로는 족쇄가 될 것입니다.
이회창 총재의 엘리트 이미지에 진보와 중도 진영까지 감싸 안겠다는 포부를 담은 ‘헌법 제 1조 1항’의 사퇴의 변을 더한 유승민이라는 정치인은 이제 정치부 기자들이 반드시 따라붙어야 할 중요한 취재원이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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