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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이집트 교민사회와 특파원의 만시지탄(晩時之歎)

이집트 한국인 폭탄테러 전과 후

[월드리포트] 이집트 교민사회와 특파원의 만시지탄(晩時之歎)
생각하기도 싫은 시나이 반도 타바의 한국인 관광버스 테러 사건이 벌어진 지 벌써 열흘이 가까워 옵니다. 현지 가이드였던 故 제진수씨의 고귀한 희생이 더 큰 피해를 막았지만, 사상 초유의 한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폭탄 테러의 쓰라린 기억은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충격의 이집트 교민사회…晩時之歎

이 사건 이후 이집트 교민사회의 충격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천 명도 되지 않은 카이로를 포함한 교민 가운데 한국에서 온 지상사 주재원들과 가족들을 제외하면 나머지 교민 대다수는 관광업과 이를 기반으로 한 요식업 등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향후 몇 년 간 이집트 내 한국인 관광 - 특히 대부분이 이번 테러가 일어난 시나이 반도를 경유하는 성지 순례객들이었던 - 은 사실상 불가능해 진 상황이라 많은 여행업계 종사자들은 잠시 이집트를 떠나 터키 등 주변국으로 기반을 옮기는 문제를 고민 중이라고 합니다.

 또 교민회 게시판엔 최근 이집트 내 정세 변동과 맞물린 테러 발생 가능성에 대해 지나치게 간과해 온 것 같다는 晩時之歎의 글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이번 테러를 현장에서 취재하기도 했고, 지난 몇 년간 이집트 교민사회를 안팎에서 볼 수 있었던 저는 이런 일련의 움직임들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습니다.
이집트 폭탄 테러

예견된 테러…비운의 희생자가 된 한국인들

가장 큰 안타까움은 이번 테러가 충분히 예견됐었다는 점입니다. 지난 해 7월 이집트 군부가 선거로 선출된 이슬람 정권을 쿠데타로 전복한 이후 이집트 내의 강경이슬람 세력의 발호와 테러 시도 가능성은 어느 때보다 높아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합법적 정부를 전복하고 헌정질서를 중단시킨 폭력적 방법을 동원한 이집트 군부의 입장에선 이슬람세력에 대한 강경탄압을 이어갈 수 밖에 없는 외통수에 빠져 있었고, ‘선거’라는 합법적 정치공간을 박탈당한 이슬람 진영, 특히 무장세력들의 움직임이 빠르고 집요해 질 것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었던 시점입니다.

이런 시점에 저는 당시 8뉴스 기사를 통해 시나이 반도 여행의 위험성을 경고하기도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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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기사가 방송된 이후 교민사회 곳곳에서 저를 비난하는 목소리들이 직간접적으로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SBS가 카이로 교민들 밥줄을 끊기로 한 것이냐?’는 이야기부터 ‘특파원은 몇 년 뒤 가면 그만이지만, 여기 있는 여행업자들은 어떻게 하란 말이냐?’ 등등.. 더구나 어느 집에 숟가락 몇 개인 지도 알 정도로 손바닥만한 교민사회에서 다들 얼굴 알고 지내던 여행사 사장님들도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더군요.

그리고 며칠 뒤 카이로 한복판에서 군부는 반군부 시위대 천 여명을 백주대낮에 무차별 학살합니다. 카이로 도심에서 총격이 난무했고, 말 그대로 이집트의 관광산업은 완전히 마비됐습니다.

이집트 군부는 상황을 장악하기 위해 도심 전역에 병력을 투입했고 이후 집권세력이던 무슬림 형제단 지도부를 무더기 체포하고 조직을 와해시키는 등 강력한 억압정책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는 군부의 힘이 상황을 통제하면서 극도의 혼란이 가라 앉는 듯 했습니다.

제 생각은 달랐습니다. 물이 끓는 냄비에 뚜껑을 덮고 올라 앉는다고 물이 넘치지 않을 수 없는 형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여름의 카이로 학살은 아랍권 최대 국가이자, 수니파의 핵심국인 이집트를 호시탐탐 노려 온 알 카에다 등 과격파들에겐 향후 수십 년 간 자양분이 될 게 분명했습니다.

당시 월드리포트 코너에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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맴도는 불안감…최악의 현실이 되다

그러나 한시가 급했던 여행업계와 교민사회에선 이제 한 숨 돌렸다는 분위기가 감지됐습니다. 뜨거운 사막바람이 가라앉고 여행업 성수기인 겨울철이 되자, 성지 순례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습니다. 카이로의 여행 가이드가 바닥이 날 정도였고, 한동안 파리 날리던 한식당에도 단체 여행객들이 자리를 채웠습니다.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교민들의 사정이 이해가 가기도 했고, 그래서 여행객들이 늘어나는 게 다행스럽다고 생각하기도 했지만, 늘 일말의 불안감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지난 해 하반기 군부의 재등장 이후 실제로 이슬람 과격파들은 카이로 시내 곳곳에서 폭탄 테러를 감행해 왔고, 이번에 한국인 관광객들을 테러 대상으로 삼은 ‘안사르 베이트 알 마크디스’는 카이로의 교민밀집 지역에서도 로켓포로 테러공격을 시도한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제 머리를 떠나지 않던 불안감은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최악의 테러로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타바 테러 현장의 참혹함이 아직도 눈 앞에 어른거립니다. 귀를 찢는 폭탄 소리에 기절했다 병원에 옮겨져 정신을 차린 어느 생존자의 “우리만 살아서 미안하다”는 울음소리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습니다.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그들을 지켜봐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이번 사건은 쉽사리 잊히지 않는 ‘트라우마’로 평생을 따라 다닐 것입니다.
이집트 여행 관광

특파원의 晩時之歎

가슴이 아프네요. 지난 해 여름 시나이 반도 순례객들 문제를 지적한 기사를 쓸 때도 뻔히 얼굴 아는 이집트 교민들이 여럿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제가 기사를 쓰면 그 분들이 어려움을 겪을 것도 예상할 수 있었고 욕을 먹을 것도 알았지만, 그래도 써야 했습니다. 대부분이 평생의 꿈인 성지순례를 꿈꾸고 있을 한국의 잠재적 여행객들을 무작정 위험에 노출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 편으로는 후회도 됩니다. 이집트 여행의 위험성을 경고한 지난 해 여름 기사에 대해 어느 원로 교민께서 “교민들 밥그릇을 건드리면 안된다”고 하시길래 저는 “똑같은 상황이 벌어지면 똑 같은 기사를 다시 쓸 수 밖에 없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 실제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여행제한지역인 시나이 반도 성지순례가 몇 달째 다시 이어지고 있었고, 위험성도 여전했지만 겨우 침체에서 벗어난 교민사회에 다시 찬물을 끼얹는 일이 될 수도 있었고, 또 현실화되지 않는 위험에 대해서는 좀처럼 무감각한 한국사회의 특성상 기사가 잘 먹힐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교민들의 만시지탄도 그렇지만 저 역시 제가 욕 좀 더 먹더라도 한 번 더 관련기사를 썼더라면 혹시나 우리 여행객들이 비극적인 테러의 희생양이 되는 걸 막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뒤늦은 반성을 해 보게 됩니다.

제가 그리 특별히 뛰어난 기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급적 지키려고 노력하는 원칙 같은 게 있다면 ‘이익’을 기사 판단의 기준으로 삼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국익이던 회사의 이익이던, 아니면 개인의 이익이던 ‘이익’이 판단의 기준이 되면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사실들을 축소하거나 버려고 반대의 사실들을 부풀릴 수 밖에 없습니다. 궁극적 ‘진실’을 위해 사실이 종합되는 게 아니라 ‘이익’을 위해 필요한 사실들만 편취되는 왜곡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집트에 기반을 둔 중동 특파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언론인으로서 제가 이번 한국인 테러 사건을 전후로 해서 과연 이런 작은 원칙들을 충실히 지키려 했는 지, 불편함과 성가신 비난이 귀찮아서 – 결국 이것도 누군가의 이익 때문이겠죠 – 책무를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닌 지 스스로를 되돌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끝으로 이 글을 빌어 이번 테러 사건의 희생자와 유가족, 부상자와 가족 여러분들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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