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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당신의 시간은 얼마짜리입니까

유통업체 '줄 세우기' 마케팅에 대한 단상

[취재파일] 당신의 시간은 얼마짜리입니까
따뜻하고 얇아서 소비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발열 내복. 저도 참 좋아합니다. 그래도 2만 원짜리를 선착순 500명에 한해 반값에 판매하는 행사에 새벽 6시부터 얼마나 많은 사람이 나올지는 의심스러웠습니다. 새벽 5시 반에 도착했을 때까지만해도 다소 한산한 매장 앞 풍경을 보면서,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서서히 줄이 길어지더니 개점 직전에는 어림잡아 200~300명 정도 모였고, 한참 들어가서 취재를 하던 도중 바깥을 내다보니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습니다. 진짜 놀랐습니다. 1만 원 할인에도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일 정도로 우리나라 경제가 어려워진 것일까요.

사실 이러한 '줄 세우기' 마케팅은 애플이 신제품을 출시할때마다 이용하면서 효과를 톡톡히 본 기법입니다. 줄을 서서 어렵사리 물건을 손에 넣은 사람에게는 뿌듯한 성취감을 주고, 줄에 서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는 '저게 그렇게 대단한 물건인가'라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그야말로 일석이조인 것이지요.

이러한 예는 또 있습니다. 해외 유명 디자이너와 매년 협업(콜라보레이션)을 통해 제품을 출시하는 한 SPA 브랜드의 행사에는 아예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은 물론, 대신 줄을 서주는 아르바이트도 등장합니다. 문이 열리고 줄 선 순서대로 색색의 팔찌를 찬 사람들이 옷이며 신발을 사들이는 장면은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분명하게 말씀드리지만, 저는 제 기사에 인터뷰를 해 주셨던 소비자들을 비난할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 마침 출근하는 길에 조금만 서두르면 값싸게 물건을 살 수도 있는 것이고, 할인율이 그리 크지 않을지언정 해당 제품은 워낙 인기가 많아서 다른 매장에서는 원하는 디자인을 구하기 어렵다는 말씀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일찍 오셨던 분들 중에 발열 내복 딱 두 장만 사서 돌아가시는 분은 거의 없었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나는 과연 그 새벽에 첫차타고 나올만큼 부지런할까'라고 말입니다.
의류매장 앞 긴줄_
취재하면서 읽었던 한 마케팅 관련 논문에 따르면, 소비자들은 자신의 뒤에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을수록 그 제품에 대한 만족도가 높아진다고 합니다. 해당 논문의 실험을 빌어서 얘기해보자면, 별볼일 없어보이는 베이글빵이라도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으면 좋은 제품일 것이라는 생각을 소비자가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꿔말하면, 물건을 파는 사람 입장에서는 줄을 길게 세워놓는 것이 효과적인 마케팅 전략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좋은 물건 싸게 사는 것에 얼마만큼의 시간을 들일 것인가는 전적으로 소비자의 선택입니다. 1만 원 할인에 1천 명이 모였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팍팍한 우리네 현실을 반영하는 지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마케팅이 성공을 거둘수록 앞으로 더욱 기회비용이 높은 '줄 세우기' 마케팅이 등장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뭐, 그것도 전적으로 판매자의 선택이겠지요. 그래도, 업체에서 나눠준 어묵 국물에 추위를 잠시 잊는 그런 소비자들의 모습은 이제 그만 봤으면 합니다. 스스로 돈 내고 물건 사는데 왜 그런 고생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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