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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리포트] "글 모르면 투표말라"…역주행하는 이집트 민주주의

문맹자 투표권 박탈 논란

[월드리포트] "글 모르면 투표말라"…역주행하는 이집트 민주주의
지난 2011년 초겨울, 이집트에선 독재자 무바라크를 쫓아낸 뒤 처음으로 민주적 절차에 의한 총선이 실시됐습니다. 지금은 군부 쿠데타로 축출된 무슬림형제단이 제 1 정치세력으로 부상한 바로 그 선거였죠.

이슬람 세력의 승리 여부에 관심이 쏠리기도 했었지만, 되짚어보면 오히려 투표장 주변의 여러 풍경들이 제 눈길을 끌었던 기억이 납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후보자와 정당을 알리는 온갖 모양의 현수막과 광고물들이었습니다. 한국도 선거철이 되면 전국 방방곡곡이 실현 가능성 여부와는 상관없는 묻지마 공약들을 적은 현수막들로 공해를 언급할 정도지만, 이집트의 상황도 못지 않았습니다.

난립한 정당 수 만큼이나 현수막과 광고물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고, 후보자가 하도 많아서 유권자들은 누가 누구인지를 구분하는 게 투표보다 힘든 과제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전체 국민의 20%가 넘는 천 600만 명이상이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인 상태여서 이들이 어떻게 투표에 참여할 지도 관심거리였습니다.

해결책은 의외로 간단했습니다. 거리 곳곳의 현수막과 투표 용지엔 아랍어로 된 정당명과 후보자명과 함께 각각을 상징하는 그림이 함께 인쇄돼 있었습니다. 어느 정당은 저울, 또 다른 정당은 사과 뭐 이런 식으로 문맹자들이 그림을 보고 투표할 수 있게 한 것이죠. 후보자가 하도 많아서 신문지만했던 투표용지에서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 그림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과 후보를 구분하고 기표했습니다. 전 이게 문맹자들에 대한 배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집트 시위대 캡쳐

“글 모르면 거짓 선동에 속는다..투표권 박탈해야”

하지만 군사 쿠데타로 이슬람세력을 축출한 뒤 이집트 사회 일각에선 이런 문맹자들의 투표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주장이 솔솔 피어 오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문맹자들의 선거권 박탈이 이집트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이들의 논리는 이렇습니다. 문맹자들이 글을 몰라 충분한 정보를 접할 수 없고, 떠도는 풍문이나 잘못된 정치적 선동에 의해 투표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이 때문에 실제 산적한 정치적 난제를 해결할 국민의 대표가 뽑히는 게 아니라 선전선동에 능한 정치꾼들이 뽑혀 민주주의의 원리가 오히려 작동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덧붙입니다.

하지만 인권 시민단체들은 문맹인 선거권 박탈 주장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를 갖다 붙여도 국민기본권인 투표권을 제한해야 민주주의가 발전한다는 해괴한 논리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죠. 또 글을 모르는 사람들이 충분한 정보를 접하지 못해 잘못된 선전선동에 속아 투표한다는 가정도 문맹자들에 대한 편견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습니다. 정반대로 오히려 온갖 대중매체와 SNS 등을 통해 넘치는 정보를 접하는 비문맹자들이 오히려 거짓정보와 선전선동에 휩쓸릴 가능성이 더 많다는 반박도 가능하겠죠.

“이슬람세력 정치진입 막으려는 술수”

이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은 대부분 무르시 전 대통령을 쿠데타로 축출한 군과 과도정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정치분석가들은 이런 주장의 배후에는 아마도 다음 총선에서도 이슬람세력을 대표하는 정치세력이 굳건한 지지세를 확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치밀한 작업이 있을 수 있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문맹자들 대부분이 저소득층으로 전국 곳곳의 모스크에서 어떤 형태로든 도움을 받아온 잠정적인 이슬람 세력의 지지자들이고, 실제로 모스크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성직자들이 선거과정에서 이들 문맹자들의 의사결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헌법을 통한 이슬람 정당의 정치참여 금지를 명문화하고, 무소속 또는 다른 형태로 의회에 진입하려는 이슬람세력을 어떻게든 막겠다는 군과 과도정부 지지자들의 생각이 반영된 주장이 언론을 등에 업고 논란으로 번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집트 군부 캡쳐_

고개를 치켜든 군과 기득권 세력들…역주행의 가속페달


이런 시대착오적 논란은 곧 지난 여름 군사 쿠데타 이후 진행되고 있는 이집트 사회 변화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쿠데타라는 헌정 중단 사태를 주도한 사람들도 민주주의 수호를 얘기했고, 이슬람세력은 물론 군부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을 테러리스트로 몰아 검거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과도정부 역시 이들이 민주주의의 적이라고 둘러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주장들은 온갖 언론과 대중매체들이 앞장서서 확대 재생산하고 있습니다.

군과 과도정부를 지지하는 이 세력들은 지난 한 세기 동안 끊임없이 부를 세습하며 기득권을 장악해 왔습니다. 시민혁명 이후 독재자 무바라크의 퇴출 속에 이런 기득권 해체의 요구가 이집트 사회에 봇물처럼 터져나오자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던 이들 기득권층은 지난 여름 쿠데타로 군이 다시 전면에 등장하자 공공연히 안도감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지 않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글을 모르면 민주주의도 모른다’는 해괴한 주장을 내세워 다른 국민들의 선거 참여마저 봉쇄할 수 있다는 역주행의 가속페달에 더욱 힘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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