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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귀태' 한 마디에 멈춰버린 국회

[취재파일] '귀태' 한 마디에 멈춰버린 국회
'귀태' 라는 말 한마디에 정국이 얼어 붙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포기 발언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여야의 국가기록원 자료 열람 일정도 무기한 연기됐습니다. 진주 의료원 폐업 사태를 계기로 시작한 공공의료원 정상화를 위한 국정조사 특위로 마무리인 조사보고서 채택을 앞두고 공전되고 있습니다. 국정조사 위원들의 자격을 문제 삼아 공전돼 왔던 국정원 국정조사 특위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국회가 멈췄습니다.

민주당의 홍익표 원내대변인은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귀태(鬼귀신 귀胎 태아 태)라며, 태어나지 말었어야 할 사람이라고 비유했습니다. 또 귀태의 딸, 박근혜 대통령이 유신공화국을 꿈꾸고 있다고 논평했습니다.

홍익표
귀태라는 말은 우리말 사전에도 없고, 저는 사실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귀신이 잉태된 것이라는 한자뜻 그대로만 봐도 섬뜩하고, 지나친 논평이라는 생각입니다. 홍 원내대변인은 책에 있는 내용을 인용한 것으로 '국가주의 운영시스템'을 책에서는 귀태라고 비판한 것인데, 자신의 논평이 책 내용을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아 확대해석이 되는 것 같다'고 한 말 물러섰습니다. 그러나 그건 여권이 초강력 반발을 한 뒤에 해명을 한 것이고, 논평에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귀태라고 지칭했습니다.

청와대는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유감 표명을 했습니다. 김 행 대변인은 이 발언 직후 "대통령을 뽑아준 국민에 대한 모욕'이라고 비판했고, 한 번의 입장 표명으로는 부족했는지 오늘 아침 다시 이정현 홍보수석이 "국민이 선택한 대통령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자유민주주의에 정면 도전한 것"이라면서 민주당이 국민과 대통령에게 사과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새누리당은 홍익표 원내대변인의 국회의원직 사퇴와 민주당 대표의 사과를 촉구하면서 모든 상임위 일정을 중단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귀태'라는 논평 자체는 분명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국회가 하던 일마저 모두 안 할 필요가 있는지, 갸우뚱해집니다.

새누리당과 청와대 입장에서 이해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우선, 최근 민주당의 친노진영에서 꾸준히 지난 대선 결과의 공정성을 문제 삼으며 선거 결과를 부정하는 발언들이 나왔습니다. 점잖게 선거 결과를 부정하면 안된다던 문재인 전 대선 후보 마저, 최근에는 '불공정한 선거였고, 박근혜 대통령이 혜택을 봤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면 단순히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박근혜 대통령을 부정할 수 있다는 여론 몰이가 시작된 것 아닌가, 여권은 신경이 곤두설 수 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와중에 박 대통령의 뿌리라 할 수 있는 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존재의 부정'성 발언이 민주당 친노계 원내대변인의 입에서 나온 것을 청와대는 묵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박 대통령은 아버지 시대에 아버지가 한 일들에 대해서는 국민들의 여론 악화를 본인이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부정하거나 비판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지난 대통령 선거 당시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한 역사인식 논란으로 지지율에 위기를 맞기도 했었고, 결국은 원론적 차원에서 반성할 부분도 있다는 것을 밝힘으로써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건 대통령 선거를 앞둔 대선 후보로서의 단 한번의 결단이었을 것입니다.

민주당은 말 한 마디 가지고 뭘그러냐며 꼬투리 잡지 말라고 하지만, 청와대와 새누리당에겐 말 한 마디로 넘길 수 없는 부분인 겁니다. 원래 '말의 칼날'이라는 게 던지는 사람은 그 아픔을 모르는 법이니까요.

그러나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지금 싸우고 있는 방식은 국민의 입장에서 보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왜 이런 감정섞인 싸움으로 당 전체의 정치활동에 대한 자격을 운운하면서, 국회 활동도 안하겠다고 하는 것인지, 그다지 중요한 이슈가 없는 평시의 국회라도 한다면 하루이틀 정도 기 싸움을 하는 것으로 백번 양보에서 이해할 수도 있겠습니다.

국정원 캡쳐_500
그런데 지금 국회에는 국정원 국정조사 특위가 가동 중에 있습니다. 사상 처음으로 국가정보기관에 대한 국정조사를 하겠다면서 여야가 서로 멋있는 척 하며 합의해서 특위가 가동에 들어간 지 벌써 열 하루가 지났습니다. 45일간 국정조사를 하겠다고 하면서 벌써 10여 일을 국조특위 위원과 증인들을 문제 삼으며 허송세월을 하고 있었습니다. 10여 일 동안 해놓은 것도 없으면서 또 멈추겠다는 겁니다.

또 그렇게 공공의료의 근간을 흔드는 중대 사태라며 시작한 진주의료원 사태에 대한 국정조사는 어떻습니까? 이제 내일(13일)이면 활동 기간 종료입니다. 원래 오늘 전체회의를 열어서 조사결과 보고서를 만들고, 또 국정조사 증인으로 출석하지 않은 홍준표 경남 지사 등 8명의 증인들에 대한 고발 조치 등을 할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공공의료 국정조사 특위도 오늘 회의를 못하게 되었으니, 국정조사는 결과물도 없이 끝나게 됐고, 그렇게 응징하겠다던, 국회에 대한 모독이고 국민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비판했던 증인 불출석에 대해서도 국회는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게 됐습니다.

남북대화록_500
2007년 남북정상회담 기록물 열람은 또 어떻습니까? 오늘 국가기록원에 가서 목록들을 보고 국회 제출해 달라고 할 자료를 추리기로 했는데, 그래서 15일쯤 받아서 보기로 했는데, 이 또한 무기한 연기됐습니다.

이러니, 애시당초 국정원 국정조사나, 공공의료 국정조사나, 남북정상회담록 확인이나 모두, 그때 그때 정치적 위기를 넘기기 위한 방편이었을 뿐, 그 사안에 대해서 국회의원들이 진정성을 가지고 규명과 해결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스러운 겁니다. 상대방이 뭔가를 잘못했을 때 그것만 비판하면 되지 '옳다구나' 하고 '다 안할래' 하는 건 유치하지 않습니까? 여당이나 야당이나 '기싸움' 으로 이름 붙여 주기도 아까운 이런 방식의 싸움은 언제쯤 역사 속으로 사라질 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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