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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PIP 교육’을 아십니까? ②

정년 60세 시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취재파일] ‘PIP 교육’을 아십니까?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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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P 교육을 둘러싼 논란은 비단 현대차뿐만이 아닙니다. 학습지 회사 대교 역시 지난 2007년부터 ‘자기혁신 아카데미’라는 이름의 PIP 교육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대교의 PIP 교육 대상자 선정 기준은 평가 결과 하위 30%인 사람들입니다. 대교의 PIP 교육 방식은 현대차처럼 연수원 합숙이 아니라 재택 교육인데요, 교육 내용과 방식에 교육대상자들은 혀를 내두르고 있습니다.

우선 석 달의 교육기간 동안, 대교가 출간하는 초등학생, 중학생 대상의 학습지 수백권을 토씨 하나 빼놓지 않고 모두 외워서 시험을 본다고 합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 학습지에 대한 교사용 풀이서도 목차까지 모두 외워야 하고, 1주일에 한 권씩 경영학 관련 인터넷 강의도 수강해야 한다는 겁니다. 한 교육 대상자는 “상식을 초월하는 수준”이라면서, “사실상 나가라는 퇴출프로그램”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실제 PIP 교육 대상자로 통보되면 대부분 회사를 떠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교육과정에 대한 모멸감은 몰론, PIP 교육 즉시 임금이 70% 수준으로 깎이고, 회사를 나가라는 압박과 회유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너, 아카데미 갈래? 비정규직으로 전환할래? 3개월 치 위로금 받고 그만둘래?” 이런 식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대교에는 지난 6차례 PIP 교육 대상자 153명 가운데, 현재 회사에 남아있는 사람은 25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런 이유로 대교에서는 지금껏 단 한 명의 정년퇴직자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대교는 <현장21>의 취재 요청에 서면 답변을 보내, “사회 통념상 그 합리성을 인정받은 당사 고유의 성과관리제로”라고 밝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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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P 교육은 금융권에서도 은밀하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올해 초 BC카드에서는 ‘BC 혁신학교’라는 이름의 PIP 교육이 진행됐습니다. 대상자는 부장급 간부 6명.

BC카드사는 원래 노사 관계도 평화롭고 회사 분위기도 가족적인 문화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난 2011년 KT가 회사를 인수한 뒤 분위기가 돌변했다고 하는군요. 이른바 ‘KT식 노무관리’가 도입되면서 근속이 오래된 간부들을 대상으로 먼저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희망퇴직을 ‘희망’하지 않은 사람들도 당연히 있었겠지요. 이 사람들에게 회사가 떠낸 카드가 바로 PIP 교육이라고 합니다.

회사는 부장급 간부 6명을 회사의 한 사무실에 모이게 한 뒤, “매주 모바일카드를 30매 모집해와라. 매주 과제를 내줄테니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하라. 매일 오후에는 교육에 참석하고 매주 금요일에는 시험을 칠 것이다”라는 식으로 PIP 교육을 운영했다고 합니다. 이에 모욕감과 배신감을 느낀 부장 1명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하며 회사를 그만 두었고, 나머지 부장급 5명은 결국 정규직에서 퇴사한 뒤, 기존 임금의 50% 수준인 비정규 무기계약직으로 재입사하라는 회사의 조건을 울며 겨자먹기로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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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자가 된 부장급 6명은 젊은 시절 일을 열심히 해서 남들보다 먼저 부장으로 승진했던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 일이 있은 뒤로 “저렇게 잘 나갔던 사람들도 결국 버림을 당하는구나, 나도 언제 저런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라는 인식이 사내에 퍼지면서 회사 분위기가 극도로 뒤숭숭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한 BC카드 간부사원은 취재진에게, “선배들이 퇴출되고, 그게 내 미래가 될지 모르는 불안한 상황에서, 어떻게 사원들이 융화가 되고, 회사가 발전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면서, “가족 같았던 우리 회사가 왜 이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전문가들은 IMF를 거친 뒤 2000년대 초반 성과연봉제 등 미국식 성과주의 인사제도를 기업들이 대거 도입하면서, PIP 교육도 시작됐다고 말합니다. “KT가 C-PLAYER라는 성과부진자 프로그램을 이용해 수천명의 직원을 퇴출시켰다”는 논란이 불거진 이후 기업들의 퇴출프로그램은 사회적 관심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KT를 제외한 다른 대기업들이 암암리에 진행하고 있는 훨씬 정교화한 PIP 교육은 아직 우리사회의 큰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최근 ‘갑을관계’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활발한 가운데, 정작 갑을관계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사용자-노동자 간의 문제는 아직 다뤄지지 않은 셈이지요.

물론 기업들이 성과가 부진하거나 문제가 있는 직원들을 무조건 정년까지 데려가야 한다는 것은 무리한 주장일 것입니다. 기업도 경쟁력 강화를 위해 적절한 인력 조정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그 방식은 노사 간 대화와 합의를 통한 것이어야 하고, 회사를 나가는 당사자들에게도 충분히 납득할 만한 이유와 사후 대책이 제시돼야 할 겁니다. 이런 과정 없이 ‘역량 향상 교육’을 빙자해 사실상 퇴출로 이어지는 결과를 빚는다면, ‘이런 방식은 편법’이라는 사회적 비판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법률사무소 새날 김기덕 대표 변호사의 말은 어쩌면 PIP 교육에 대한 상식적 잣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기존에 수행하던 업무에서 업무능력이 떨어져서 뭔가 교육이 필요하다, 회사 자체로, 그래서 실시하는 거라고 하면 그건 문제가 안 됩니다. 실시하면 되고요. 그런데 지금 PIP라고 하는 것의 최종적인 목적은, 종착지는 그겁니다, 퇴출. 퇴출이 없는 상태에서 PIP는 문제가 안 돼요."

대통령이 강조한 ‘일자리 늘, 지, 오’ 공약, 곧 다가올 정년 60세 시대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노사정 모두 공히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 논의의 과정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핵심 의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PIP 교육을 받고 퇴출로 이어지는 사람들, 대부분 베이비붐 세대(1955년생-63년생) 직장인들입니다. 보통 30여년 넘게 회사에 헌신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나이가 들었다고, 젊은이들보다 쓸모가 적어졌다고, 이들을 솎아내고 내치는 것만이 능사일까요? 임금피크제가 됐든, 직무재배치가 됐든, 이들이 평생 쌓아 온 전문성을 활용할 새롭고 조화로운 발상은 불가능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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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를 마칠 무렵 만난 한 PIP 교육생의 바람은 소박했습니다.

마지막 남은 정년까지 가족들하고 자식들한테 부끄럽지 않은 아빠, 남편으로서 일을 해보고 싶고, 마지막으로 명예롭게, 자랑스럽게 직장생활을 마치고 은퇴했으면 좋겠습니다.

이 말이 무리한 욕심, 헛된 희망으로 들리지 않는 시대가, 바로 ‘국민행복시대’가 아닐까 합니다. 이번 PIP 교육과 관련한 <현장21> 보도(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818739)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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