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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사람 잡는 전기난로

얼어서 고민, 타서 고민…야외근로자의 이중고

[취재파일] 사람 잡는 전기난로
전기난로를 쬐다가 몸에 불이 붙었습니다.

상상이 가십니까?

이 추운 겨울, 전기난로 한 번 안써본 사람 찾기가 더 어려울 것 같은데, 그 흔하디 흔한 전기난로를 쬐다가 몸에 불이 붙다니요. 그래서 처음 이 사고 제보를 받았을때 전 언뜻 머리 속에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cctv를 보니 입이 떡 벌어졌습니다. 진짜로 전기난로 쬐다가 몸에 불이 붙는 영상이었습니다. 제가 보도한 뉴스를 보신 분들은 아마 그 영상을 보셨을 겁니다. [영상 보기]

지난 달, 아주 추운 날 새벽이었습니다. 농수산물 도매 시장에서 일하는 한 젊은 남성이 등에 전기난로를 쬐며 서 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을 쬐고 있떤 등에서 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기 시작합니다. 처음엔 잘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피어 오릅니다. 그런데 연기가 점점 거세집니다. 허연 연기가 화면을 흐릴 정도로 강하게 뿜어져 오릅니다. 그러더니 연기가 나던 자리에 팍 하며 불이 붙습니다. 등에서 시작된 불은 이 남성이 머리에 뒤집어 쓰고 있던 후드에까지 옮겨 붙었습니다. 등에서 목줄기를 타고 머리까지 불꽃이 치솟아 오릅니다. 마치 '고스트 라이더'라는 헐리우드 SF영화의 한 장면을 방불케 합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건, 불이 이렇게 솟구치는데 난로를 쬐고 있는 남성은 자기 몸에 불이 붙은 걸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뜨겁지도 않나 봅니다. 오히려 여유롭게 뒤를 돌더니 이번엔 몸의 앞부분에 난로불을 쬐기 시작합니다. 등에선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말이죠! 그렇게 30~40초 정도, 이 남성 등에서 불길이 계속 피어올랐습니다. 그제서야 이 남성은 자기 등을 휙 쳐다봅니다. 네. 이제야 안 겁니다. 자기 등이 불타고 있단 걸. 그제서야 화들짝 놀라서 얼른 점퍼를 벗으려 하지만 옷을 하도 많이 껴입다보니 제대로 벗겨지지도 않습니다. 가게 밖으로 뛰쳐나가서야 간신히 점퍼와 후드티를 벗어던졌습니다. 옷이 두꺼워서 그나마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뒷통수 머리카락이 조금 탔고, 두피를 약간 뎄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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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1분 정도 되는 CCTV 영상을 보며 저는 이런 사람이 어딨냐 싶었습니다. 자기 등에서 그렇게 활활 불길이 치솟고 있는데 뜨거워 펄쩍펄쩍 뛰기는 커녕, 앞면-뒷면 돌아가며 한가하게 난로불이나 계속 쬐고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 영상을 본 다른 사람들의 반응도 비슷했습니다. '얼마나 둔하길래 이걸 모르냐', '이 화재는 영상 속 피해자가 유독 무감각해서 생긴 특이한 사고 아니겠느냐' 등등. 그래도 뭔가 미심쩍어서 이 청년이 일한다는 농수산물 도매시장을 찾아갔습니다. 그 날도 아침 기온이 영하 10도를 뛰어넘는 무척이나 추운 날이었습니다. 온 세상이 얼어붙은 것 같은 강추위에 상인들은 옷을 5겹, 6겹 두껍게 껴입고 삼삼오오 난로 옆에 모여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독 난로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젊은 남성이 보였습니다. CCTV에 찍힌, 전기난로 화재사고를 당한 바로 그 장본인이었습니다.

기자 "추운데 왜 난로 옆에 안계시고 이렇게 멀리 떨어져 계세요?"
남성 "아.. 그 날 불 붙은 사고 이후로 난로 가까이서 안 쬐요."
기자 "많이 놀라셨나봐요."
남성 "네.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그 남성의 말인 즉슨 이랬습니다. 그 날 유난히 추웠던 날씨 탓에 옷을 평소보다 더 두껍게 입었답니다. 무려 5겹을 껴입어서 움직임도 상당히 둔했다더군요. 그런데도 추위가 가시질 않아서 전기난로를 최고 강도로 틀어놓고 바로 앞에 바싹 붙어서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겉 옷에 불이 붙은건데, 문제는 옷이 너무 두꺼워서 불이 그렇게 활활 타오르도록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날이 추워서 콧물까지 나다보니 타는 냄새도 안났다고 하고요. 당시 상황에 대해 인터뷰 하던 중, 옆에서 듣던 다른 상인이 거들었습니다.

옆에 있던 상인 "맞아요. 옷이 이렇게 두꺼우면 불붙어도 몰라요."
기자 "아 그런가요?"
옆에 있던 상인 "그럼요. 저도 얼마전에 난로 쬐다가 소매에 불이 붙었는데 몰랐어요. 나중에 보니까 옷에 구멍이 나 있길래 이렇게 꿰멘거예요."
기자 "아, 이런 분이 많나요?"
옆에 있던 상인 "네. 아마 여기 상인들은 한번 씩 다들 경험 있을 걸요. 옷이 이렇게 두꺼우면 불 붙어도 몰라요."

그래서 그 농수산물 시장을 한바퀴 돌아 봤습니다. 정말로 소매나 밑단이 조금씩 타 있는 옷을 입고 있는 분들이 군데군데 보이더군요. 그 분들도 모두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겨울엔 너무 추워서 전기난로를 안 쬘 수가 없는데, 춥다고 전기난로에 바짝 붙어서 몸을 녹이다 보면 옷이 타는 경우가 꽤 많다고요. 그런데 옷을 두껍게 입다보니 옷이 타는 걸 전혀 모른단 겁니다.

얼핏 들으면 당연한 얘기 같지만, 뉴스 만드는 기자 입장에선 구체적인 실험을 안해 볼 수 없겠죠. 소방서의 협조를 얻어 전기난로 화재 실험을 했습니다. 먼저 면티와 패딩점퍼를 준비했습니다. 불은 면이 확실히 잘 붙더군요. 면은 전기난로 가깝게 갖다대니 금새 흰 연기가 나더니, 동그랗게 옷이 타들어가다가, 불이 확 붙었습니다. 그리곤 활활 타올랐습니다. CCTV 영상에 나온 것과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반면 폴리에스터 재질의 패딩 점퍼는 면처럼 불이 확 붙진 않았습니다. 마치 플라스틱이 불에 녹듯, 옷 표면이 녹아 눌러 붙으면서 연기만 내뿜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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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을 5겹을 껴입혀 놓고 온도를 재 봤습니다. 불에 녹아드는 패딩 점퍼 표면 온도는 200도 가까이 됐습니다. 하지만 5겹 옷의 안쪽, 그러니까 사람 피부에 닿는 쪽의 온도는 열이 거의 전달되지 않아 영하3도에서 0도를 왔다갔다 했습니다. 아무리 옷이 5겹이라지만, 방열복도 아니고 바깥 온도는 200도가 넘는데 안쪽 온도는 0도라니요. 예상보다 안과 밖의 온도차는 훨씬 더 컸습니다. 이러니 당연히 옷에 불이 붙는다 해도 실제 옷을 입은 사람은 그걸 순간적으로 알아차리기 어려울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번 보도에서 제가 하고 싶었던 얘기는 이겁니다. 복사열을 내뿜는 전기난로를 지나치게 가까이서 쬐면 화재 위험이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옷을 두껍게, 두껍게 입으면 밖에서 불 난 걸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단 것도 어찌보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런 피해에 가장 취약한 것이 가뜩이나 넉넉치 못한 시장상인, 건설근로자, 환경미화원 같은 야외에서 일하는 분들이라는 겁니다. 이 유난스런 엄동설한에 하루종일 바깥에서 일해야 하는 분들, 당연히 옷 두껍게 입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설치가 간단한 전기난로를 사용합니다. 그래도 춥다보니 난로 앞에 바짝 바짝 붙어서게 됩니다. 그러면 화재 사고에 노출 될 위험이 커지는 겁니다. 한겨울에도 이렇게 야외노동을 하는 근로자가 우리나라에 얼마나 많을까요? 100만 명은 족히 넘을 겁니다. 그런 분들 한 분 한 분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화마에 휩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다 아는 내용일 지언정 다시 한번 경각심을 심어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직도 겨울이 꽤 남았습니다. 한파도 계속해서 주기적으로 찾아오고 있고요. 야외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어는 것 신경쓰랴, 타는 것 신경쓰랴.. 더 힘겨운 겨울을 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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