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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명연설의 법칙? 클린턴과 미셸의 경우

미국 정치인들의 말말말…그 속에 담긴 공통점

[취재파일] 명연설의 법칙? 클린턴과 미셸의 경우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를 다녀왔습니다. 노스 캐롤라이나주의 주도인 샬럿이라는 곳에서 열렸습니다. 2008년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도시로 꼽힌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런데 민주당 전당대회 때문에 미국 각지에서 10만 명 가까운 인파가 몰려서 제가 있는 동안은 서울 한복판보다 더 복잡하더군요. 그래도 도시 곳곳에서는 축제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왔습니다.

그동안 텔레비전을 통해서는 미국 정치인들의 연설을 꽤 들은 편입니다만 이번에 직접 현장에서 살아 있는 연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텔레비전 화면은 연설자 일방적이지만 현장은 연설자와 청중의 생생한 상호작용이 진행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민주당 전당대회다 보니 청중 역시 민주당 선거인단과 당원, 민주당 성향의 자발적 참여자들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누가 연설을 하든 적극 호응할 준비가 돼 있는 청중이라는 거죠. 

그렇다고 해도 연설의 내용에 따라서 반응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한국 언론에도 보도가 됐습니다만,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를 통해서 많은 미국인들의 뇌리에 각인된 명연설은 대략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오바마 대통령 부부, 그리고 조 바이든 부통령과 훌리안 카스트로 샌 안토니오 시장의 연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단연 발군은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예정시간을 20분 정도 넘긴 50분 가까운 긴 시간 동안 청중을 웃고 울리고, 밀었다 당겼다 그야말로 자유자재였고, 그러면서 자신의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누구보다 명확하게 전달했습니다. 많은 연설을 지켜보면서 명연설에는 나름의 법칙(적어도 미국 정치인들에게는 해당되는)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먼저, 진솔한 자기 고백입니다. 누구나 남이 알지 못하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는 미화하거나 아니면 과장하기가 쉬운데 그렇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기자들이 하는 말처럼 그야말로 팩트 위주로 얘기합니다.

리틀 오바마로 불리며 이번 민주당 전당대회 첫 날 분위기를 한껏 띄우는 역할을 했던 카스트로 시장의 말부터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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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할머니는 고아였습니다. 14살 때 멕시코에서 친척들이 살고 있던 미국 샌 안토니오로 왔죠. 초등학교 4학년 때 학업을 그만두고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 이후로 평생을 가정부와 주방 요리사, 베이비시터로 일했습니다. 제 어머니가 저와 제 쌍둥이 동생에게 더 나은 미래를 줄 수 있도록 제 어머니를 위해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할머니는 제가 시장이 된 것을 보지 못하셨습니다만, 두 세대 아래 후손이 미국의 시장이 되고, 또 다른 사람은 연방하원의원 후보가 된 것을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여러분, 저희 가족의 이야기는 결코 특별하지 않습니다. 특별한 것은 바로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미국입니다."


많은 미국 여성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미셸 오바마의 연설도 살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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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아버지는 시청 상하수도부에서 일하던 펌프 기술자였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비록 제가 어렸어도 아버지가 거의 매일같이 아파했던 사실을 잘 압니다. 아마도 매일 아침 일어나는 것조차 아버지에게는 큰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제 아버지는 매일 아침 웃으면 일어나셨습니다. 신발끈을 조여매고 천천히 면도를 하셨죠. 오빠와 저는 아버지가 퇴근할 무렵이면 우리가 살던 작은 아파트 계단 꼭대기에서 아버지를 기다렸습니다. 아버지는 천천히 올라와 우리 둘을 꼭 껴안아 주셨죠. 그 힘든 나날들 속에서도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거의 하루도 일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둘에게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해주겠다는 의지 때문이었습니다."


청중은 "지금은 누가 봐도 멋진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보통 사람들처럼 저렇게 힘든 날들이 있었구나" 하면서 그 연설에 동화될 수 밖에 없겠죠.

두 번째는 촌철살인의 유머입니다. 이 부분에서 압권은 역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44살의 나이에 미국 대통령이 돼 8년 동안 재임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이번 연설을 통해 십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50분이라는 긴 시간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게 연설인데, 단 한 순간도 자신의 연설로부터 청중이 멀어지지 않도록 하는 유머 구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어젯밤 이후로는 미셸 오바마와 결혼할 센스를 갖춘 사람이 대통령이 되기를 원합니다."

"오바마는 정말 건설적인 협력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공화당원 3명을 장관으로 기용했습니다. 4년 전 제 아내 힐러리 경선 캠프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중용했습니다. 심지어는 힐러리를 국무장관에 임명했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기 전에 공화당 정부가 미국의 빚을 4배로 만들었던 것 아직 기억하시죠? 제가 그만두고 나서 8년 동안 다시 공화당 정부가 두 배로 만든 것도. 그렇게 산수를 무시하는 공화당 사람들에게는 아직도 2+2는 4라고 생각하는 아칸소 시골 출신이라는 사실이 영 불편할 것입니다."


세 번째는 물론 뛰어난 메시지 전달력입니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청중에게 쏟아붓는 절정의 연설솜씨 말입니다. 좋은 연설을 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지 전달력이 어쩌면 가장 중요한 부분이겠죠. 물론 메시지 자체가 옳은 것이어야 하고, 청중과 코드가 맞아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습니다만, 혹시 청중이 원하지 않는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부인할 수 없고 의심할 수 없도록, 마침내 인정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몰아붙이는 순간이 되면 상관 없는 제 가슴에도 웬지 불꽃이 튀는 듯, 눈에도 물기가 생기는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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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이 변화는 불가능하다는 냉소주의에 빠진다면 변화를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목소리가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생각을 포기한다면 다른 목소리가 그 빈 공간을 채울 것입니다. 바로 1천만 달러의 수표로 이번 대통령 선거를 사려고 하면서 여러분의 투표를 더 어렵게 만들려고 하는 로비스트들과 특정 이해집단들의 목소리가 말입니다. 여러분만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만이 미국을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제가 8년 전 이 전당대회에서 연설한 후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시간도 변했고 저도 변했습니다. 저는 더 이상 후보가 아닙니다. 저는 미합중국 대통령입니다. ....

만일 여러분이 미국의 약속이 소수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거부한다면 이번 선거에서 여러분의 목소리가 들릴 수 있도록 해주셔야 합니다. 저는 이 여정이 쉬울 것이라고 약속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갈 길은 힘들 겁니다. 하지만 그 길은 더 나은 미래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우리가 갈 길은 멉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갈 겁니다. 되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한 사람도 뒤에 두지 않고 함께 갈 것입니다. 승리를 통해 더 강해지고, 실수에서 배우면서 우리는 저 먼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오바마는 역시 청중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만, 혜성처럼 등장했던 8년전 전당대회,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가득찼던 4년 전 전당대회 때보다는 못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승리를 확신할 수 없는 이번 대선의 흐름이 오바마를 조금은 초조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은 언론에서 주목하지 않았지만 조 바이든 부통령의 연설을 살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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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갈 길은 여러분이 정합니다. 여러분을 위해 봉사한 일, 그리고 항상 여러분 편에 서 있는 대통령과 함께 봉사한 일은 큰 영예였습니다. 저는 오바마 대통령의 강인함과 신념을 압니다. 여러분에 대한 대통령의 확신 또한 잘 압니다. 저는 이 남자를 압니다. 맞습니다. 경제 회복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진행 중입니다. 희망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우리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변화가 필요한 이유도 아직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단 우리는 그 길로 가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미국 최고의 날은 여러분 앞에 있습니다. 그 길로 우리는 가고 있습니다. 지평선의 빛 속에, 우리에게 영감을 주고 우리를 규정하는 가치를 위해서는 오직 하나의 선택만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시작한 일을 끝냅시다. 오바마를 다시 뽑읍시다."


노회한 정치인의 이미지가 강한 조 바이든 부통령 역시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는 뛰어나기 그지 없었습니다. 차분하게 시작했다가 절정에 이르러서는 숨 한 번 쉬지 않고 달려가더군요.

이렇게 나름의 법칙을 정리하면서 우리 정치권에는 이런 뛰어난 연설가가 얼마나 있을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사람마다 여러 차이가 있겠습니다만, 2002년 대선 때 놀라운 바람을 일으켰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능가하는 정치인이 쉽게 떠오르지 않더군요. 예로부터 말을 잘 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부정적 인식이 자리잡고 있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정치인의 모든 정치행위는 사실상 말입니다. 법안을 만들고 상대를 공격하고, 자신의 세력을 옹호하는 모든 일들이 다 말로 이뤄집니다. 그 말속에 진심을 담았느냐가 문제가 될텐데, 바로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이 그 말의 진실성을 보여주지 않을까 싶습니다. 따라서 명연설 속에는 무엇보다 성실하고 치열하며 남을 위해 봉사해온 인생이 자리잡고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어릴 적부터 남들 앞에서 말하도록 훈련시키는 미국의 교육 방식도 명연설의 버팀목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상대의 눈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도록 한 교육이 어린 학생들을 변화시키고, 그렇게 성장한 미국인들 중에 공공 봉사의 길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은 더 열정적으로 살고, 그 속에서 깨닫고 쌓아온 경험을 자신의 생각과 정책으로 가다듬은 뒤 진심이 담긴 말로 대중을 설득해 나가도록 하는 하나의 시스템이 갖춰져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도 이제는 말 잘하는 멋진 정치 지도자를 가질 자격은 갖춘 것 같은데요, 여러분 생각은 어떤가요?

 * 민주당과 공화당 전당대회가 끝난 뒤 워싱턴 포스트는 공화당과 민주당 전당대회의 베스트 5 연설을 선정했습니다. 1위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 2위는 바텐더였던 쿠바 출신의 아버지를 소개하면서 아메리칸 드림을 강조한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 3위는 미셸 오바마, 4위는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 5위는 리틀 오바마로 불리는 멕시코계의 훌리안 카스트로 샌안토니오 시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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