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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종로 한복판서 대형 화재…반복되는 인재

[취재파일] 종로 한복판서 대형 화재…반복되는 인재
점심 약속을 앞두고 지하철을 타고 안국역으로 향하던 길이었습니다. 11시 반쯤 서울시경 캡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경복궁에서 검은 연기가 나고 있으니 빨리 가 보라고. 남대문이 불에 타 버린지 얼마나 됐다고 또 문화재에 불이 난건지, '악'소리가 났습니다. 이런 대형 악재를 두고 그야말로 멘탈붕괴가 시작될 무렵 전화기가 계속 울려댔습니다. 정부 청사에 근무하는 친구들에게서 문자가 날아왔고, 심지어 여의도에서 일하는 직장인들도 시커먼 연기가 보인다며 제보(?)를 쏟아냈습니다.

지하철에서 내려 경복궁으로 뛰어 들어가려는데, 검은 연기가 경복궁 밖에서 나는 게 보였습니다. 경복궁을 구경하려던 외국인들도 뜻하지 않은 연기에 코를 막고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삼청동 들어가는 길 공사장에서 불이 나고 있었습니다. 진입로에서 경찰이 통제하는 걸 보니 '일단 문화재는 아니구나', 한시름 덜었습니다. 

묘한 안도감(?)을 느끼면서 현장으로 뛰어갔습니다. 불이 난 곳은 국립현대미술관을 짓는 공사장이었는데, 근로자들이 힘겹게 빠져나오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소방차가 계속해서 공사장 안에 소방 호스를 연결하고, 앰뷸런스는 몇 대가 오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소방대원들이 구조한 근로자들은 10여 명, 3명이 아직 공사장 안에 고립된 상태였습니다.

모든 화재 현장이 그렇듯이 가장 무서운 건 가스 질식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인명 피해가 늘어납니다. 간신히 빠져나온 근로자들은 지하 3층 천장에서 스파크가 일면서 불이 난 걸 봤다고 했는데, 특히 지하라면 더 위험합니다. 일단 불이 나면 시커먼 연기 때문에 앞도 잘 보이지 않고 가스가 빠져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큰 불은 30분 만에 잡았고 한시간 반 만에 불은 완전히 다 꺼졌지만, 소방대원들의 구조 작업은 계속됐습니다. 처음엔 연기를 마셔서 병원으로 옮겨진 근로자들이 속출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누구는 화상을 입었고, 누구는 불길을 피해 크레인으로 올라갔다가 달궈진 크레인에서 버티지 못하고 지하 1층으로 떨어져 다리가 부러졌습니다. 현장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사람도 있었고, 앰뷸런스를 타고 가다 숨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후 3시쯤 집계된 인명피해는 사망 4명에 중·경상 25명, 눈 깜짝할 사이에 종로 한복판에서 대형 사고가 난 겁니다. 

신축 공사장인지라 제대로 된 소방시설이 설치되지 않았던 게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스프링클러는 시공하려던 참이었고 주변에 소화기 몇 대만 놓고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공사장 내부에는 질소 탱크나 용접용 산소 같은 폭발 물질이 많이 있었다는데, 폭발에 대비한 안전 시설은 없었습니다. 현장 근로자들은 우레탄 단열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데, 이 작업만으론 불이 날 리 없기 때문에 더더욱 작업 환경이 어땠는지 의심스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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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정부가 국립현대미술관을 빨리 완공하기 위해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했다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미술관 건립에 참여한 자문위원들은 완공까지 4년이 걸린다고 했지만, 정부는 21개월 안에 모두 짓겠다는 목표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시공사 측은 공사 기간과 화재는 관련이 없다면서 이런 주장들을 반박했습니다. 하지만 근로자들은 지하 기계실 천장에 설치된 임시등을 켜자 불꽃이 튀면서 우레탄에 불이 붙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경찰과 소방당국이 여러 차례 현장 감식한 결과 임시등이 과열되거나 합선됐을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현장에서 안전 관리는 제대로 이뤄졌는지, 공사 기간을 줄이는 과정에서 꼭 해야 할 안전 점검을 놓치진 않았는지 의심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08년 이천의 한 물류 공장에서 큰 불이 났습니다. 당시 수습기자였던 저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시커먼 하늘에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그 다음으로 매캐한 연기에 숨조차 쉬기 어려웠던 기억도 납니다. 근로자 40명의 목숨을 한번에 앗아갔던 최악의 사고였습니다. 소방 시설이 제대로 갖춰졌는지, 작업 순서를 지켰는지, 이런 것들이 말로는 간단해 보이지만 사람의 목숨을 쥐락펴락한다는 걸 제대로 배웠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걸 모르는 사람들이 있나 봅니다. 무엇보다 경복궁을 불과 50여 미터 앞둔 공사장에서 그랬습니다. 그 어느 곳에서도 '다행'인 사고는 없는데 말입니다. 1년에 한번씩 반복되는 '인재'를 볼 때마다 시커먼 하늘만큼 답답한 마음도 반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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