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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흑인들 한 마음으로 '미소천사' 추모

작은 선행이 남긴 기적

[취재파일] 흑인들 한 마음으로 '미소천사' 추모
지난 주 금요일(현지시각) 워싱턴DC의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샌드위치 가게를 찾았습니다. 이름은 ‘그레이스 델리’. 이 가게의 주인은 하루 전날 새벽 문을 열다가 갑자기 들이 닥친 강도의 권총을 맞고 숨졌습니다. 올해 나이 64살, 영어 이름 준(June), 한국 이름 임해순 씨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 누구에게도 작별인사를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현지 시각으로 금요일 새벽 뉴스를 보고 알았습니다. 한미 외교국방장관 회담 결과를 리포트하기 위해 새벽부터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워싱턴 WLD NBC의 아침뉴스 앵커 은 양이 'Woman found dead in H st-area Deli'라는 제목의 앵커멘트를 했습니다. 임해순 씨라는 이름에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소식을 전한 은 양 역시 한국계 미국인으로 얼마전 한미경제연구소 창립 30주년 기념 만찬에서 사회를 보기도 했었습니다. 이 리포트와 다른 보도를 종합한 결과 지역 주민들이 임해순 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몹시 슬퍼하면서 진실된 마음으로 고인을 추모하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날 낮 12시 임 씨의 가게 앞에서 추모집회가 열릴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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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낮 12시를 조금 넘겨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부랴부랴 워싱턴 지국 스텝들에게 전화를 하고 부지런히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워싱턴은 서울처럼 주차하기가 쉽지 않은 곳인데, 가게 옆 골목으로 들어가 보니 완전 흑인동네였습니다. 주차를 하고 내리는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동네 사람들이 유심히 저를 지켜 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워싱턴은 북서, 북동, 남서, 남동 이렇게 네 구역으로 나눠지는데 북서쪽을 제외하고는 모두 흑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입니다. 남동 쪽의 경우, 다른 인종을 거의 찾아 볼 수 없고, 북동쪽 역시 최근에 개발이 많이 돼 백인들과 히스패닉(중남미계)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는 하지만, 임해순 씨의 샌드위치 가게가 있는 동네는 아직 흑인들이 대다수였습니다.

그렇게 주차를 하고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1시가 지난 상태였지만, 여전히 많은 흑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가게 벽에는 임 씨를 추모하는 글들이 적혀 있는 카드와 임 씨를 추모하는 의미의 꽃들이 빼곡이 붙어 있었습니다. 냉정해야 할 기자지만, 제 가슴 속에도 울컥 뭔가 올라오는 듯 했습니다. 애써 삼키고 글들을 하나 하나 읽어봤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엄마, 사랑하는 친구, 곧 할머니가 됐을 정말 좋은 사람, 당신이 그립습니다.’ ‘그레이스(가게 이름을 따 이 곳 사람들은 임해순 씨를 그레이스라고도 불렀답니다.) 당신을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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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우리에게 해줬던 모든 일들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그대가 보여준 친절함과 따뜻한 미소를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일일이 세기가 힘들 정도로 많은 카드에는 지역 주민들이 하나 하나 손으로 정성스레 쓴 추모의 글들이 가득했습니다. 또 울컥, 그 순간 더 늦기 전에 인터뷰를 해야겠다 싶어 가게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서성대는 주민들 몇 사람을 인터뷰했습니다. 추모의 글들과 내용이 비슷했지만, 그 인터뷰에서 왜 이 곳 사람들이 임 씨의 죽음을 이렇게 한마음으로 슬퍼하는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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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는 우리를 진심으로 대했습니다. 우리가 가게 가서 주문을 하고 지금은 돈이 없다, 내일이나 다음에 주겠다고 하면 그냥 줍니다. 그것도 환하게 웃으면서...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이런 천사 같은 사람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범인은 반드시 잡혀야 합니다. 기도할 겁니다”는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엄마가 “그레이스가 세상을 떠났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습니다. 이렇게 좋은 사람이 우리 곁을 떠났다니...”하고 울먹이자 그 옆에 있던 중학생 아들은 “그레이스는 항상 저를 보면 뭘 도와줄까 하고 묻고, 배고프다고 하면 빵을 주곤 했어요.”라고 거들었습니다. “우리 동네 사람들 모두가 그레이스를 잘 압니다. 이 가게를 지나다가 그냥 궁금해서 들여다 보기도 했고, 그럴 때마다 그레이스는 환하게 웃으면서 음료수도 주고, 빵도 주고 했습니다. 이런 짐승같은 짓을 한 범인은 꼭 잡혀야 합니다.” 

이 때 가게 안에서(임해순씨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가게는 문을 닫은 상태였습니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모여 있던 흑인들에게 “날도 더운데 마셔라.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면서 음료수를 무료로 나눠줬습니다. 직감적으로 아들 같았습니다. 안 그래도 가게 벽에 붙어 있던 아들의 글이 저를 비롯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차라 아들을 꼭 만나고 싶었습니다. 한국이름 도일 씨, 임도일 씨는 다른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그리워 하는 글을 직접 써서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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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사랑해요, 아직도 엄마에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아요. 제 아이가 태어날 때 엄마도 꼭 함께 해주실 것을 알아요.”

모자를 눌러쓴 도일 씨를 어렵게 인터뷰 했습니다. 한국말이 서툰, 영어가 더 친숙한 도일 씨지만 한국 방송사라고 하니까 굳이 한국말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먼저 애도의 뜻을 표하고, 어머니가 하루 전에 돌아가셔서 경황이 없을 텐데,가게에는 어떻게 나왔느냐고 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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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가게를 혼자 다하셔서 아버지도, 저도 동생도 가게일은 아무 것도 몰라요. 여기 서류같은 것, 그리고 보험같은 문제도 있고 해서 그런 것들을 정리하려고 나왔습니다.”

동네 주민들이 와서 한마음으로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들었냐고 물었더니 도일 씨는 끝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습니다.

“난 솔직히 우리 엄마가 이렇게 좋은 일을 하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까 마음이 편해요. 사람들이 와서 너무 좋은 사람이라고... 너무 슬픈데 여기서 이렇게 사람들이 써준 글들 보고 하니까 그래도 마음이 좀 괜찮아요. 우리 엄마가 이 일을 8년을 했어요. 매일 새벽 4시반부터 저녁 7시까지. 어떻게 8년을 그렇게 해요. 게다가 매달 2천달러씩 적자도 봤어요.그런데도 매일 나가야 된다고, 사람들이 기다린다고 그랬어요. 엄마가 돌아가셔서 이제 이 가게는 문을 닫을 것 같아요." 

엄마에게 보낸 글 중에 아이 부분을 물어봤습니다.

"마음입니다. 그냥. 올 10월에 제 아이가 태어나는데, 우리 엄마 첫 손주인데,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러니까 엄마가 그 때는 꼭 와주실 거라고 그냥 ...."  (한국말이 서툰 도일 씨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봤습니다.)

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듯 도일 씨는 다시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조금 뒤 제가 또 다른 인터뷰를 하다가 문득 돌아봤는데 가게 모퉁이 한쪽에 놓인 촛불과 꽃다발 앞에서 도일 씨는 한 쪽 무릎을 꿇고 오열하고 있었습니다. 엄마를 잃은 아들의 슬픔을 그 한 장면이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그 화면이 제가 리포트할 때 그대로 나갔습니다. 이렇게 마무리하고 지국으로 돌아가려는데 지나가던 흑인이 저를 보고 제 손을 잡고 한마디 하고는 휙하고 가버렸습니다.

“정말로 마음이 아픕니다.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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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알지 못하는 사람인데, 그리고 제가 유족도 아닌데, 그는 그냥 저에게 자신의 마음을 다 전했다는 듯 표표히 사라졌습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임해순 씨는 정말 좋은 분이었다는 생각을 다시 했습니다. 흑인들이 워싱턴 지역에서 모여 사는데는 경제적으로 백인보다 어려운 탓도 있지만, 독특한 그들만의 끼리끼리 문화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흑인들에게 이렇게 한 가족처럼 인정받기는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임 씨의 작은 선행(작은 선행이라는 표현은 임 씨가 미소와 함께 빵을 줬던 사람들에게는 한 개인이 받은 도움이었다는 뜻으로 썼습니다)은 생각지도 못했던, 그러나 이 세상에서 큰 힘과 많은 재산을 가졌던 사람도 쉽게 얻을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더욱이 임 씨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지역 주민들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나라 사람중에 임 씨만큼 한국의 이미지를 선하고 좋은 이미지로 수백 명에게 확고하게 심어준 사람이 또 얼마나 있을까 싶었습니다.

뉴스 제작을 하고, 인터넷에 기사가 나가고, 저와 같은 마음의 시청자들이 남겨주신 댓글도 봤습니다. 마음이 짠하다는, 임 씨의 명복을 빈다는 그 따뜻한 마음들이 전달됐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이 지역 언론사들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 댓글들을 읽어 봤습니다. 임 씨를 추모하는 한편, 이런 끔찍한 살인을 한 범인을 반드시 잡아 죄의 값을 치루게 해야 한다는 글들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그 마음들이 합쳐져 범인은 반드시 잡힐 것입니다. 워싱턴 경찰은 범인 체포에 2만 5천 달러의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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