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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누가 그들을 '짐승'으로 만들었을까?

[취재파일] 누가 그들을 '짐승'으로 만들었을까?
아버님을 따라 올라간 곳은 아파트 옥상으로 연결된 구석진 공간이었습니다. 가로 1m50cm, 세로 3m 남짓한 크기였습니다. 대리석 바닥의 냉기가 순식간에 목덜미까지 타고 올라왔습니다.

"이 곳이 우리딸이 당한 곳입니다." 아버님의 목소리는 담담했습니다. 전등 스위치를 올리자 남학생들 틈에 둘러싸인 채 눈을 질끈 감고 있는 13살 여자아이의 환영이 불빛보다 빨리 달려드는 듯했습니다.

"집에 우리가 없는 걸 확인한 다음 초인종을 누르고 협박했대요. 집에 있는 거 다 안다고. 나오라고. 안 열면 다음날 학교에서 죽도록 얻어 맞았다는 거에요." 들을수록 숨이 턱턱 막혔습니다. "끌고 나와서 싫다고 하면 전화를 건답니다. '그놈'한테. 그러면 '그놈'이 다시 전화해서 하라는 대로 안 하면 죽여버린다고 협박한 거죠. 그러면 어쩔 수 없이...12명한테 그렇게 수십 번을 당했대요. 그걸 경찰이 밝혀주신 겁니다." 녹음기를 들고 있던 손이 부르르 떨렸습니다.

같은 나이의 여자 동급생을 시도 때도 없이 윤간하고 온몸에 시퍼런 멍이 들게 때리고 옷을 찢고 돈도 뺏은 그 아이들은 도대체 어떤 아이들일까. 그들의 패륜적 범죄를 학교와 교사와 부모님은 정말 몰랐을까 아니면 모른 척했을까... 취재 하는 동안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드는 생각이었습니다.

한 여자아이의 몸과 영혼을 마음껏 유린한 남자아이들은 같은 학교 동급생이거나 다른 학교 동급생들이었습니다. 그래도 대부분은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습니다. 그 중 '그놈'은 2명이었습니다. 나머지 14명은 소위 '그놈들'의 명령에 따르거나 '그놈들'에게 기대어 범행을 저지른 녀석들이었습니다.

"상담교사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고 그러더군요. 왜 담임이나 학교 측에 알리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그걸 꼭 말할 의무는 없었다고 합디다." 아버님의 하소연은 이어졌습니다. "딸아이가 너무 괴로워서 어느 날 선생님한테 질문했답니다. 00약을 먹으면 어떻게 되느냐고, 죽을 수도 있냐고. 그랬더니 쓸데 없는 질문을 한다며 다그치기만 했답니다."

"우리 딸이 가해 학생들 몇몇 한테 편지를 썼어요. 교실에서 있었던 일들, 학교 생활하면서 느꼈던 점들... 용서해주겠다는 내용이죠. 그런데 가해 학생 부모님들의 말에 정말 억장이 무너집니다. 우리 애가 그 남자애들이 좋아서 편지를 쓴 거래요. 연애편지 아니냐는 거죠."

100%는 아니지만 성폭행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책임 미루기'의 전형입니다. 남학생들의 부모들은 자식들의 범죄를 미리 몰랐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늦게라도 알게됐다면 바로 잡아야지요.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를 바라야지요. 자식들을 보호한답시고 피해 학생과 그 부모를 걸고 넘어지는 것은 또 다른 범죄입니다.

아버님은 생각 이상으로 초연했습니다. 아마도 눈물이 말라버렸나 봅니다. 딸을 꼭 안고 삶을 버텨내려면 더는 감정 따위에 굴복할 수 없었을 테지요. "우리 딸과 애 엄마, 곧 한국을 떠납니다. 인터넷에 우리 딸 중학교 검색하면 이름이 뜨는데 여기서 어떻게 살 수 있겠어요." 아버님의 탄식이 지금도 귓가에서 웅웅거리고 있습니다.

아, 아버님은 딸을 위한 복수극이 아니라 딸이 겪은 비극이 더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그놈들'과 공범들을 법의 심판대에 세웠고, 결국 심판을 받게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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