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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벌금의 공포(?) 민주주의의 열망(?)

혼돈 속의 첫 발, 이집트 총선

[취재파일] 벌금의 공포(?) 민주주의의 열망(?)
30년 동안 무바라크 독재의 형식과 내용을 추인해 온 의회는 더 이상 민주주의의 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시민혁명의 와중에 가장 먼저 공격당해 아직도 카이로 시내의 흉물스런 화재의 참상으로 남아 있는 곳이 바로 무바라크 시절의 집권당 건물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많은 이집트 사람들의 마음 속엔 의회가 과연 시민의 목소리를 제대로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인지에 대한 의구심이 상당합니다. 더구나 무바라크의 죽마고우, 탄타위 장군이 장악한 과도정부 하에서 치러지는 혁명 후 첫 총선이라 무바라크 시절의 어두운 그림자를 새로운 의회에서 완전히 걷어낼 수 있을지도 의문스러운 모양입니다.

오늘 선거 이틀째, 당초 예상보다는 많은 유권자들이 투표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눈초리와 실시간으로 상황을 퍼나르는 SNS는 혁명의 원동력이 됐던 것처럼 선거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투표장으로 향하는 유권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6천 명 이상 난립한 후보자가 도대체 어느 정당 소속인지, 무슨 정책을 내놨는지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정책은 없고 '구호'만 난무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죠. 더구나 문맹률이 40%를 넘는 상황에서 어떻게 투표율을 높이느냐는 과도정부를 이끌고 있는 군부의 최대관심사입니다.

  


군이 주도하는 과도정부의 정치적 정당성은 무바라크 퇴진 이후 9개월간 끊임없이 도전받고 의심받아왔고 급기야 선거를 앞둔 지난 열흘 간 대규모 시위와 4천 명 가까운 인명 피해를 낸 유혈 충돌이 계속돼 왔습니다. 군이 차기권력을 장악하려는 야망이 있건 없건, 그에 관계없이 군 과도정부가 관리하는 선거의 투표율이 저조하다면 군부는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게 되겠죠.

그래서일까요? 이번 선거 투표율을 끌어올리기 위해 온갖 머리를 짜내고 있습니다. 가장 황당한 게 투표에 불참한 유권자에게 5백 이집션파운드, 우리 돈 10만 원 가량의 벌금을 매기겠다는 겁니다. 이 곳 경찰 공무원 월급이 한 6백 파운드 정도이고,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계를 꾸리는 서민 가계가 절반에 달하는 상황에서 이런 정도의 벌금은 투표 안 하면 밥그릇을 걷어 차버리겠다는 공포스런 협박일 수 있습니다.

또 문맹자들을 투표장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투표용지에 아랍어 대신 그림으로 소속 정당을 표시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한 표의 권리가 있으니 당연히 이런 배려가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다급한 군 과도정부의 속사정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우리에게도 '직선제'라는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보하기 위해 수많은 피를 흘려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 20여 년 간 절차적으로 확보한 민주주의의 공간을 내용적으로 채우는 데 실패했고, 지금 절차적으로 정당성을 확보했다고 주장하는 거대 정치세력의 반민주적, 반사회적 행태에 많은 국민은 삶의 터전과 기본권을 유린당하며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제 겨우 투표다운 투표를 해 볼 권리를 확보했다고 말하기에도 여러 모로 불완전한 이집트의 현실은 그래서 중동을 휩쓴 시민혁명의 갈길 먼 앞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뚜렸한 지도자 없이 백가쟁명의 양상을 띄고 있는 이번 시민혁명의 특성상 이번 선거로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한 정치세력이 일단 권력을 장악하면 시민혁명을 주도한 일부 세력을 끌어 안으면서 따흐리르 광장을 뒤덮었던 혁명의 열기를 교묘히 분쇄해 나갈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실제로 지난 열흘 동안 진행된 반군부 시위에 최대 정치세력인 무슬림형제단은 참가하지 않았습니다. 이 상태에서 선거를 치러도 집권 가능성이 높은데 굳이 선거연기와 군부퇴진을 요구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이전부터 무슬림형제단에게는 '개혁'과 '민생'보다는 권력 자체가 관심사였던 거죠.

결국 광장을 뒤덮었던 민생의 요구와 정치 사회 개혁의 구호들은 정치세력의 일시적인 세일즈 구호로 전락했고, 그렇게 피를 흘려가며 쟁취했던 '자유선거' 이후의 절차적 민주주의에 의해 다시 희생당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지금의 한국처럼 적지 않은 시간, 또 수많은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지난 시민혁명이 싸움의 '끝'이 아닌 '시작'임을 깨닫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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