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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북 "우리가 뭐 얘기 못할 것 있습네까?"

미국에 온 북한 사람들 취재기

[취재파일] 북 "우리가 뭐 얘기 못할 것 있습네까?"

저는 지금 미국 조지아주 애떤스라는 작은 도시에 있습니다. 조지아대학이 있는 곳이죠. 이 대학의 대석좌교수(University Professor)인 박한식 교수가 주최한 세미나를 취재하고 있습니다.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트랙 2라는 제목인데요, 트랙 2가 의미하는 것은 다름 아닌 민간 차원이라는 뜻입니다. 정부간 대화와 협상은 트랙 1이라는 거죠.

2009년 북한의 6자회담 이탈과 지난해 천안함-연평도 도발 이후 냉각된 한반도 분위기를 어떻게 하면 풀 수 있느냐가 세미나의 주제입니다. 이종혁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비롯해 북한에서 9명이나 참석했습니다.북한에 대한 미국의 유화적 태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종혁 부위원장등 북에서 온 7명에게 미국이 입국 비자를 발급해줬고, 박철, 최일 유엔대표부 북한 참사관 2명에게는 25마일 이상 벗어나면 안 된다는 규제를 풀어줬습니다.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내심 원하고 있다는 신호로 해석될 수 밖에 없겠죠.

제 개인적으로는 참 오랜만에 북한 사람들을 취재할 기회를 갖게 됐습니다. 워싱턴에서 이 곳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봤습니다. 취재를 위해서 금강산은 대여섯 번, 개성은 세 번, 그리고 평양도 한 번 방문했습니다.

그 때마다 이런 저런 북한 사람들을 만나볼 수 있었고, 특히 가왕 조용필 씨의 평양 공연을 취재하러 갔을 때는 꽤 여러 명을 만나 많은 얘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름도 기억나고, 고려호텔과 평양시내의 풍경도 아직 생생합니다.

특히 이번에 북한 대표단을 이끌고 있는 이종혁 부위원장은  2005년인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SBS 목동 사옥에도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제가 안내를 했었고, 제가 평양을 갔을 때 순안공항과 유경체육관에서 제법 긴 시간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죠. 금강산 관광 7주년 기념식 때 금강산에서도 만났었습니다. 저를 보자 마자 기억을 하더군요.

1936년생이니까 벌써 70대 중반이지만 여전히 젊어보이고 피부도 좋습니다. 그리고 어제 개막식 인삿말을 통해서는 강한 대화 의지를 나타내기도 했습니다. "남측에 보수정권이 들어선 이후에 남북관계가 파국에 처했다. 군사충돌이 빚어지는 등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조선반도의 평화와 평화통일이라는 북측의 입장은 시종 일관하다."고 말했습니다.

혹자는 전쟁위기라는 표현에 주목해 전쟁을 위협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생각하면 평화에 대한 북측의 입장이 일관하다는 데 방점이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일부 언론이 '전쟁 위협'을 제목으로 기사를 썼다가 북측 대표단의 강한 불만을 사기도 했습니다. 세미나를 준비한 박한식 교수도 그 기사가 도대체 어떻게 나왔느냐고 저한테 묻기도 하더군요.

(위의 사진은 북한 대표단의 고경훈씨와 찍은 사진입니다. 올해 41살, 토론회 사진을 쉼없이 찍더군요.)

어쨌든 이번 세미나에 참석한 북측 대표단은 얘기를 하려고 작정하고 왔다는 게 남측 사람들의 공통된 전언입니다. 자존심은 강하지만 외부의 지원이 필요한 북한의 상황이 일정 부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됩니다.

토론회가 시작되기 전 날 밤에 제가 현장에 도착했는데, 처음 보는 기자 앞에서도 거침없이 얘기를 하는 모습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천안함,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식량지원 문제 등에 대해서 기존의 입장을 그대로 고수하면서도 마치 할 말은 하겠다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한 북측 대표단은 "우리가 뭐 잘못했다고 얘기 못할 것이 있겠습네까?"하면서 "북을 도와주겠다는 뜻은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거지도 아니고 우리가 필요한 걸 줘야지, 알아서 줄테니 받아,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얘기하더군요.

북한 대표단이 인상적인 건 하나 더 있습니다. 한국 언론이 기사를 쓰면 그것을 거의 실시간으로 확인한다는 거죠. 그러고 나서는 "이 기자가 쓴 기사는 악의적인 왜곡 보도다", "이 기자는 객관적으로 보고 들은 것만 썼다"고 바로 평가를 내립니다.

기본적으로 언론에 대한 인식이 다른 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이고, 그것도 북한 내 공직에 있는 사람들이니까 자신들에게 이롭지 않은 기사를 쓰는, 자신들에게 확인하지 않은 내용을 쓰는 기자와 언론사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반감을 나타냈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여러차례 취재 경험이 있다 보니까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갈 여유가 있습니다만, 이런 상황을 처음 대하는 또 다른 한국 기자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고 노여울 수 있는 행동이죠.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 이종혁 부위원장이 SBS 카메라 앞에서 몇 마디 했습니다.

"토론은 재미있게 잘 되고 있습니다.비공개로 하니까 허심탄회하게 자기 할 소리 다하고 있죠."

"목요일에 토론회가 끝나면 언론에 배포할 합의문 하나 나오겠죠. 내일 오전까지 토론한 거 다 종합해 가지고 마지막에 하나 낼 겁니다."

"CNN과 인터뷰를 했는데 북미관계에 대해서는 내 분야도 아니고, 북미 접촉이 곧 있으니까 많이 얘기 안 했습니다. 다만 CNN기자가 저한테 미국 정부가 당신들을 어떻게 대해줬으면 좋겠냐고 묻길래 우리는 다른 거 요구하는 거 없다. 미국하고 정상적인 관계에 있는 다른 나라들하고 똑같이 차별없이 대해주면 된다고 했다."

"천안함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우리 입장을 이미 많이 표명하지 않았습니까? 이번 토론회에서도 그런 문제는 크게 제기 안 하고 있어요. 민감한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보다도 미국 사람들이 오히려 더 거북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천안함에 대해서는 우리 입장을 표명한 게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또 무슨 입장 표명을 합니까? 우리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 가지고 자꾸 들고 나오니까."

"SBS하고는 그 전 같았으면 평양 왔다 갔다 하면서 만나고 그랬을 텐데, 지금 상황이 달라졌으니까 이렇게 미국땅까지 와서 만나게 되니까 심정이 좀 착잡합니다."

"식량 지원에 대한 모니터링 철저히 하고 있습니다. 세계식량기구 대표도 다 애기하지 않았습니까? 자기들이 철저히 감독하고 그런다고..."

첫날과 둘째날 언론을 피했던 것에 비해서는 나름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 셈인데, 아쉽게도 기사가 되느냐는 관점에서 보면 기자들 말로 '얘기 안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다만 이 부위원장 발언에서 보듯 천안함에 대해서는 북한의 입장이 여전히 완강해 보입니다. "우리가 한 행동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숨진 것은 유감스럽게 생각한다"는 지난해 발언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문제는 북한이 그럴수록 남북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넓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 토론회에 참석한 한국 분들은 (정치권과 학계, 언론계) 어떻게든 천안함 문제에 대해서 돌파구를 찾아 보려는 것 같았습니다. 한국 언론의 보도 내용을 거의 실시간으로 확인하며 평양의 반응까지 감안해 발언하고 행동하는 북한 대표단을 우리측 참석자들이 어떻게 이끌어갈지 주목됩니다.

이명박 대통령도 남북관계 개선에 대해서 강한 의지를 나타내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보다 전향적으로 나온다면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고 자신들이 원하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도 이뤄낼 수 있는 조건은 갖춰져 있습니다. 처음에 언급했던 대로 미국 역시 북한과의 대화의지는 숨기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종혁 부위원장이 말한 것처럼 SBS를 비롯한 한국 언론들이 수시로 평양을 오가면서 북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 내용을 갖고 남북화해와 통일에 도움이 되는 기사를 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참고로 이종혁 부위원장은 토론회 첫 날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는 거부하면서 CNN과의 단독 인터뷰에는 응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남북 관계 개선보다는 미국과의 대화에 주력하겠다는 속내를 내보인 것으로 해석하는 기사를 썼는데 북한 대표단은 거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더군요. 지금 북한 정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단서가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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