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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무용지물' 학교 주변 보호구역

[취재파일] '무용지물' 학교 주변 보호구역

제가 초등학생이었던 80년대 말, 학교 옆에서 끔찍한 교통사고가 일어났습니다. 트럭이 어린 아이를 치어 그 자리에서 숨지게 한 겁니다. 많은 초등학생들이 끔찍한 사고현장을 목격했습니다. 사고 장소가 학교 담장 바로 옆 도로였기 때문입니다.

어린 제 기억에 따르면 초등학교 주변은 '안전지대'라기보다는 '우범지대'에 가까웠습니다. 어린이가 많았기 때문에 교통사고도 많았고, 동네 깡패에 의한 폭력도 매우 흔했습니다. 수업이 파하고 나면 학교에 몰래 들어가 담배를 피거나 술을 마시는 중고등학교 형들도 있었습니다.

적어도 학교 주변에서라도 어린이를 안전하게 보호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자, 정부는 1995년 어린이보호구역, 즉 스쿨존을 도로교통법에 도입했습니다. 학교 주변 300미터 이내에서 차량이 시속 30킬로미터로 서행하도록 한 겁니다.

스쿨존 이후 학교 주변으로 다양한 보호구역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 어린이 식품안전보호구역(그린푸드존), 금연구역(스모크프리존), 청소년폭력안전지대(블루존) 등 이름을 외우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많은 보호구역들이 생긴 만큼 아이들이 그만큼 보호를 받고 있을까. 학교를 직접 찾아 확인해본 결과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린이보호구역의 효시격인 스쿨존부터 그랬습니다. 어린이 교통사고를 막고자 도입됐지만, 최근 스쿨존에서 어린이 사고 건수는 2008년 517건에서 2010년 733건으로 오히려 증가하는 추세입니다. 직접 스피드건을 들이대보니 제한 속도인 시속 30킬로미터를 넘는 차량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규율이 제대로 지켜지도록 관리 감독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다른 보호구역도 마찬가지. 학교 주변 200미터 이내는 환경위생정화구역으로서 유흥주점이나 술집, 숙박시설 같은 청소년 유해업소가 가급적 들어서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서울의 한 초등학교 주변 환경위생정화구역엔 술집은 물론이고 이른바 티켓다방까지 눈에 띄었습니다. 담당기관인 시 교육청에선 "유해업소라고 판단하더라도 허가권을 가진 지자체에서 허가해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그럴 법을 왜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가는 해명입니다.

               



그린푸드존은 불량식품으로부터 어린이를 보호하자고 만든 구역입니다만, 역시 제대로 실현되지 않습니다. 햄버거나 떡볶이 등 식약청에서 정한 '고열량, 저영양 어린이 기호식품'을 구청에서 정한 모범업소에서는 팔 수 없도록 한 건데, 모범업소 아닌 곳에서 파는 건 따로 규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학교 주변 200미터 이내는 모두 금연구역입니다. 서울시에서 그렇게 정했지만, 그걸 알고 있는 어른들은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학교 정문에 표지판은 붙어 있지만, 어른들은 학생들 바로 옆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담배를 피워댔습니다.

청소년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자는 블루존은 서울시에서 1990년대 말에 도입했습니다. 하지만 서울시에 확인한 결과 폐지된 걸로 드러났습니다. 문제는 서울시 담당자도 언제부터 무슨 이유로 블루존이 폐지됐는지 모르고 있었고, 자료도 남아있지 않다는 겁니다.

말로만 보호구역이었을 뿐, 제대로 어린이를 보호하는 '존'(zone)은 하나도 없었던 셈입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어쩌면 '어린이 보호구역'이라는 게 단순히 교통 문제로만 접근할 게 아닌데, 도로교통법으로 시작했던 게 패착이었을지 모릅니다. '어린이 보호'를 통합적으로 사고하지 않고 각 부처마다 경쟁적으로 보호구역을 양산하다보니 결국 관리가 안 되는 '죽은' 보호구역만 늘어났다는 겁니다. 실제로 보호구역마다 담당 부처가 모두 다릅니다. 스쿨존은 경찰청, 학교환경위생정화구역은 시 교육청, 그린푸드존은 식약청, 금연구역은 서울시….

마치 폐기된 수많은 인공위성들이 지구 대기를 오염시키는 것처럼, 관리도 안 되는 보호구역들이 오히려 학교 주변을 어지럽힌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리 사회의 미래라고 할 수 있는 어린이를 위한 정책까지 정부의 전시성 행정으로 오염시켜서야 되겠습니까. 지금이라도 '어린이 보호'에 대한 큰 틀을 잡고, 남발된 보호구역을 구조조정 해서 하나라도 제대로 실현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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