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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체온 37.5도 법조를 꿈꾸며

[취재파일] 체온 37.5도 법조를 꿈꾸며

#장면1

8월 중순 소나기가 한 차례 지나간 어느 오후. 서울고법 법정에서는 사기와 횡령 혐의로 구속 기소된 40대 후반의 남성이 탁자에 버티고 서서 자신에 대한 판결 선고를 듣고 있었다. 주문이 차츰 유죄 판결을 향해 치닫자 그의 얼굴에는 ‘억울함’과 ‘결백’이 점점 돌출되고 있었다. 재판장과 피고인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이 다소 부담된 나머지 시선을 잠깐 돌려 새로운 피사체에 주목했다. 검사석이었다.

검사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평온해보였다. 5분 정도가 채 지났을까. 검사의 숨이 규칙적으로 바뀌는가 싶더니 고개가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퍼뜩 다시 올라가는 동작이 반복됐다. 학창 시절, 오후 수업에 들어온 선생님이 눈은 감고 있지만 ‘졸지 않는’ 척하며 비슷한 행동을 하던 친구를 가만히 지켜보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그러는 사이 재판장은 형을 선고했다. 2년이 넘는 실형이었다. 피고인은 울음 직전이었고, 방청석에 앉아 있던 한 여인은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그때까지도 검사는 눈을 뜨지 않았고, 숨은 여전히 규칙적이었다. 한 사람의 자유가 박탈되는 순간에 그 자유를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검찰의 그 구성원에게서 ‘마틸다’를 만나기 전 ‘레옹’의 모습이 포개졌다.

#장면2

‘부과된 과태료를 납부기한 내 미납 시는 1개월 초과 5% 가산금...(중략)...금액이 부과 됩니다’(주정차위반 과태료 부과 사전 통지서), ‘세금 미납 시에는 재산압류 등 체납처분을 받게 됩니다’(주민세 고지서)

국가가 국민에게 보내는 공문서는, 행간에 재산을 빼앗겠다거나 2년여 동안 군 복무를 시키겠다거나 하는 등의 무시무시한 의미를 담고 있긴 해도 하나같이 예의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국가 공문서 중에 국민을 상대로 반말을 내뱉는 문서가 하나 있다. 바로 판결문이다. 형사 소송이든 민사 소송이든, 무죄가 나든 유죄가 나든 당사자는 ‘참을 수 없는 반말의 무거움’으로 영 불편할 수밖에 없다. 몇몇 판사들에게 물어봐도 ‘~하라체’가 언제부터 판결문의 형식으로 자리 잡았는지 명쾌한 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다만, 어느 판사는 ‘판결의 권위’와 연관 지어 설명하고, 또 다른 판사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판결문 간소화 목적’을 한 가지 이유로 제시하기도 한다.


사법부는 변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아직까지 재판정에서 법대는 국민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게 현실이지만 법원의 화두가 이미 사법 ‘서비스’로 바뀌어 가고 있는 데서 그 변화를 조금이나마 감지할 수 있다. 그 중 법원이 보여주고 있는 내부의 움직임은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국민의 편익을 위한다는 취지로 도입 중인 전자소송은 지난 3개월 동안 변호사 등 대리인의 이용률은 낮아지고 있는 반면 일반인의 이용률은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그런 하드웨어적 변화 말고도 법정에서 피고인과 방청객을 대하는 판사들의 태도와 언행 같은 소프트웨어적인 부분은 ‘낮은 데로 임하려는’ 사법부의 노력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에 국민에게 예의를 갖춘 판결문까지 바란다면 지나친 요구일까? ‘피고인을 징역 3년에 처합니다’, ‘원고는 피고에게 1억원을 배상하고 소송 비용은 피고가 부담합니다’ 이런 판결문은 언제쯤 볼 수 있을까?

“당장은 어렵겠지만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우선 언어로 소송 당사자들을 존중해준다면 그것도 중요한 사법 서비스가 되지 않을까”라던 한 판사의 말이 문득 떠오른다.

#에필로그

대한변협이 ‘변호사도 법복 입기’ 캠페인에 나섰다. 물론 의무가 아닌 권고 사항인데다, 공식 석상에서만 착용을 한정하는 ‘파일럿 캠페인’에 가까운 듯하다. 이 캠페인의 취지는 법정에서 변호사의 위상을 제고하고, 변호사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얻고자 함이라고 한다. 법복을 입는다고 위상이 높아지느냐, 법정에서 법복을 입도록 돼 있는 검사도 안 입는다는 등의 반발이 많다는 조언은 이제 변협도 더는 듣기에 식상할 터다.

분명한 건 ‘법에 따라 저 자를 엄벌해 달라’고 구형은 해도 형을 선고 받는 당사자 앞에서는 최소한 졸지 않는 검찰, 당사자에게 눈앞이 캄캄해지는 판결은 선고했지만 언어로나마 주권자에게 예의를 갖춰주는 법원을 국민이 마다할 일이 없는 것처럼 변협도 ‘법복 착용’ 같은 그들만의 리그를 떠나 국민의 가슴에 온기를 불어넣어줄 일은 없을까 고민하는 게 국민의 사랑을 받는 시작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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