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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무바라크 재판에서 한국을 읽다

[취재파일] 무바라크 재판에서 한국을 읽다

어제(8월 3일), 중동을 포함한 세계 주류 언론의 시선이 이곳 카이로 외곽의 경찰학교로 집중됐습니다.  '살아있는 파라오'로 불리며 30년간 중동의 대국 이집트를 철권 통치해 온 무바라크 전 대통령이 법의 심판대에 세워진 역사적인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 주류 언론들은 별 관심조차 두지 않더군요... 왜 일까요?)

사실 세계적으로도, 특히 권력과 종교에 대한 절대 복종을 이슬람의 가르침으로 여겨온 아랍권에서 전직 대통령이 사법처리된다는 것은 이전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지난 시민혁명이 가져 온 변화의 폭과 깊이는 정말 놀라운 수준입니다.

미결수들이 입는 하얀 죄수복, 그리고 분신처럼 아낀다는 자신의 두 아들과 함께 침상에 누워 법정에 들어선 무바라크는 겉보기엔 병약한 팔순 노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또렸한 어조로 '무죄'를 주장하긴 했지만 아마 어떤 식으로든 그와 그의 아들들은 사법적 단죄를 피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이집트 국민들의 분노를 달랠 길이 없기 때문이죠.

어제 법정에 선 무바라크를 바라보면서 제 머리 속엔 비슷한 우리 역사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YS 시절 5.18 청산 명목으로 법정에 선 전두환과 5공을 주물렀던 세력들의 모습과 어제 카이로 특별 법정의 느낌이 놀랍도록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집권의 출발점부터가 5공 정권과 무바라크 정권은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유신독재 체제를 구축했던 박정희 대통령이 10.26 사건으로 숨진 이후 전두환은 쿠데타로 집권했고, 무바라크는 사다트 대통령이 암살당하던 당시 부통령이던 자신이 게엄령을 선포하고 집권한 뒤 30년간 철권 통치로 이집트를 지배해 왔습니다.

또 이 두 사람은 집권기간 동안 가족과 측근을 동원한 권력 남용과 부정 부패로 막대한 국부를 자신의 호주머니로 빼돌려 왔죠. 그리고는 '통장 잔고가 29만 원 뿐'이라는 뻔뻔한 주장과 '자신은 오로지 이집트 내에 하나의 은행계좌 밖에 없다'는 믿기 힘든 변명도 벤치마킹이라도 한 듯 비슷합니다.

그리고는 거센 국민적 저항에 밀려 좀처럼 겉으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지배세력에 의해 '희생양'으로 법정에 내던져진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에서 친일의 역사가 청산되지 못하고 권력의 부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간판을 바꿔 내걸며 강철 같이 견고하고 거미줄 같이 촘촘한 지배구조를 이뤄온 것처럼, 이집트 역시 19세기 말부터 거듭된 외세의 침탈과 유럽의 식민지배 역사 속에서 국가를 배신한 파렴치한 세력들(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아예 아랍어 대신 영어와 불어를 쓰는 귀족들이 많죠.)은 막대한 국부를 빼돌려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백여 년이 넘도록 수많은 권력의 부침 속에서도 카멜레온 같은 변신으로 늘 사회에 대한 견고한 지배력을 유지해 왔습니다.

이제 막 시작된 무바라크 일가에 대한 단죄는 그래서 앞으로가 더 중요합니다. 한풀이 하듯 희생양으로 던져진 무바라크 일가를 언론들은 하이애나처럼 물어뜯고, 이를 통해 그릇된 역사의 청산이 끝난 것처럼 호도된다면 이집트의 미래는 또다시 지난 세기를 지배했던 그 부도덕한 집단들의 손아귀에 들어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무바라크 퇴진 6개월이 넘도록 많은 시민들이 타흐리르 광장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것도 바로 '희생양 무바라크' 뒤에 발톱을 숨긴 그 세력들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이재오 특임장관이 방문해서 이곳 정부 관계자들을 만날 때 '이집트가 시민혁명으로 혼란스러울 때도 우리 기업들은 한 군데도 철수하지 않았다. 그건 이집트의 미래를 밝게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이집트 과도정부의 부총리였던 에히야 가말은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한국 기업이 철수하지 않은 건 그들이 여기 남는 게 더 이익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과거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진정한 개혁은 역사의 진정한 청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진리가 무너지면 어떤 퇴행을 겪어야 하는지 한국 사회의 경험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진정 필요로 한 건 돈이 아니라 피를 먹고 자라는 민주주의 역사에서 우리가 경험한 '실패한 과거청산'에 대한 타산지석의 교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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