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취재파일] 대치동 주민, 도심 속 난민 되다

[취재파일] 대치동 주민, 도심 속 난민 되다

이번 비로 많은 지역이 피해를 입었지만, 특히 대치동과 우면산 일대 등 강남 지역은 더 주목을 받았습니다. 예년과 달리 산사태 등으로 실제로 큰 인명 피해를 입은 데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사람들이 사는 곳이기 때문에 더 이목을 끌었던 것 같습니다. 한 대기업 임원의 부인이 이번 산사태로 목숨을 잃기도 했지요.

실제 대치동의 한 고가 아파트에 사는 주민들은 난민을 방불케 하는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전기실 등이 있는 지하가 침수돼, 물과 전기가 끊겼기 때문입니다. 주민들은 설거지는커녕 화장실도 가지 못했습니다. 또 며칠째 내린 비로 집에 습기가 차도 선풍기조차 켜지 못했습니다. 집에선 한 방울씩 나오는 수돗물을 욕조에 받아 겨우 세수 정도는 할 수 있었는데, 한 번 사용한 물도 그냥 버리지 않고 한 번 더 쓰는 집이 많았습니다. 아이들은 아예 학원이나 학교에 가서 씻기도 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짐을 싸서 친척집이나 인근 숙박시설로 피신한 경우도 많았습니다. 실제로 제가 몇 개 층을 돌아다니며 문을 두드려 보니 빈집이 절반 이상이었습니다. 반드시 물난리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당시 강남지역 숙박시설을 알아본 주민들은 빈 방을 찾기가 힘들었다고 전했습니다.

서울, 그것도 강남 한복판에서 도시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낯선 풍경이 펼쳐졌던 겁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다른 곳으로 갈 수 없었던 주민들은 불편함을 참고, 긍정적으로 지내려고 애쓰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주민은 "저녁에 텔레비전 없이 촛불만 켜놓고 모여 있으니 가족 간에 대화가 늘었다"고 전했습니다. 이웃 간의 정도 두터워졌다고 합니다. 이 아파트에선 이웃 간 교류가 적었는데, 어려움을 함께 겪다 보니 서로 먹을 것을 나누거나 물 나르는 일을 돕는 등 훨씬 친밀해지더라는 겁니다.

주차장에 임시 공용수도가 마련된 뒤에는, 아주머니들이 삼삼오오 모여 빨래를 하고, 아이들이 옷을 벗고 몸을 씻는 모습도 눈에 띄었습니다. 집안이 습해 놀이터 철봉에 빨래를 너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아리수를 나눠주는 식수탱크차도 인기였습니다. 설거지를 못해 깨끗한 그릇이 없는 집에선 커다란 비닐봉지에 물을 담아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특히 높은 층에 사는 노인들에겐 이런 상황이 참기 힘든 고역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물이라도 받으려면 하루에 몇 번은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끼니도 문제였습니다. 처음에 밥을 해먹을 수 없어서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해결했습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안 되는 아파트 수천 세대에서 주문이 폭주하는 바람에 인근 식당에서 아예 주문을 받지 않기로 하면서 이마저도 불가능하게 됐습니다. 저층에 살면 외식이라도 하고 오면 되는데, 고층에 사는 노인들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14층 꼭대기에 사시는 63살 박상보 할아버지를 만나 보니, 며칠째 휴대용 가스렌지로 라면을 끓여 세 끼를 모두 해결하고 있더군요. 할아버지는 건장한 편이었지만, 며칠째 14층을 오르내리다 보니 무릎이 시큰거린다고 합니다. 그래서 물을 가지러 어쩔 수 없이 계단을 내려갈 때에는 앞으로 걷지 않고 옆으로 내려간다고 하시네요. 그럼 무릎에 부담이 좀 덜 간다고요.

이런 상황이 며칠째 계속되면서, 주민들의 불만은 매우 커졌습니다. 한 주민은 근처 다른 아파트에선 하루 안에 복구가 끝났다는 신문기사를 언급하며 불만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주차장에서 빨래를 하던 한 주부는 "수해를 당하면 강남이건 어디건 힘들긴 마찬가지"라며 "강남구에서 식수 나눠주는 것까지 삐딱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는데 화가 나더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잘 살거나 못 살거나 대상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자연 재해가 무서운 것이겠죠. 부유한 사람이라고 해도 자연 재해를 당했다면, 정부의 서비스를 받는 건 당연합니다. 다만, 덜 가진 사람들에게도 신속하고 충분한 서비스가 제공되느냐가 문제겠죠. 큰 관심을 받았던 우면산 일대는 자원봉사와 지원이 집중돼 복구가 거의 완료됐지만, 동두천과 같은 곳은 복구 작업이 더디기만 하답니다. 재산의 평등은 없어도, 관심과 지원의 평등은 지켜져 모든 피해지역 주민들이 하루빨리 일상으로 돌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