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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혁명의 광장을 찾은 대통령의 남자, 무엇을 봤을까?

[취재파일] 혁명의 광장을 찾은 대통령의 남자, 무엇을 봤을까?

지난 11일 남수단 독립행사에 참석했다가 이집트를 들른 이재오 특임장관 일행을 만났습니다.

시민혁명 이후 이집트를 찾은 한국 각료로는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사실 좀 늦은 감이 있습니다. 이집트 국민의 선택에 따라 중동정책의 사활이 걸린 미국은 클린턴 국무장관은 물론이고 매케인 등 공화당 의원들까지 나서서 이집트를 수시로 찾아 정세변화를 면밀히 파악하고 있고, 아프리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중국도 발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이집트 외무장관과 부총리 등을 만나 한국의 민주화 경험과 양국관계 발전 등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고 합니다. 인상 깊었던 것은 에히야 엘 가멜 이집트 부총리의 기품 있고 따뜻한 모습이었습니다.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대화를 이끄는 모습은 관료라기 보다는 옆집 형님같은 모습이더군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가멜 부총리는 이 장관이 이집트를 떠난 다음 날, 임시 정부의 지지부진한 개혁에 항의하는 시민들이 다시 타흐리르 광장에 모여 시위를 벌이자 곧바로 사임해 버렸습니다.

가멜 부총리는 그러나 시민혁명으로 쟁취한 소중한 민주주의 성과나 시위에 참여한 시민들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개혁의 속도에 대한 현실적 어려움을 수십 년간 독재의 그늘에서 지내 온 시민들에게 설득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얘기했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절대로 이집트가 과거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확신에 찬 모습으로 말하더군요.

30여 분간의 대화를 마친 후 이재오 장관 일행은 타흐리르 광장에서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는 민주화 시위대를 방문했습니다. 예정에 없이 갑자기 이뤄진 방문이라 한국 특파원들이 따라가지를 못해서 안타깝게 사진 한 장도 없는 게 좀 안타깝군요. 이 장관은 이 곳에서 '시민 혁명을 지지하며 이집트에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 한국 정부도 더 많은 지원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후 점심식사 자리에서 이 장관과 이런 저런 얘기들은 나눴는 데 이 장관은 "타흐리르를 찾고 보니 예전 6.3시위와 87년 민주항쟁 때 시청앞 광장에서 느꼈던 그 느낌을 느꼈다"며 "어떤 권력도 도도한 시민혁명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하더군요.

멀게는 대학생 시절, 이후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등 쿠데타로 집권한 군부에 저항하는 재야 운동에 투신했던 이 장관이고 보면 21세기 중동사의 흐름을 바꾸고 있는 타흐리르 광장에 선 감회가 남달랐을 법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장관이 타흐리르 광장에서 청춘을 바쳤던 과거 자신의 반독재 투쟁 시절의 추억을 그저 회상하는 데 그친다면 이번 방문의 의미는 반감될 수 밖에 없을 겁니다.

권력의 의지에 배치되는 시민의 목소리를 '좌빨'로 둔갑시키고 '광장'을 차벽으로 막아 위헌이라는 판단까지 받아가면서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 정부의 책임있는 각료로서 타흐리르에 넘실거리는 시민 혁명의 물결을 보며 저항의 방식이 다르지만 시대 정신은 결코 다르지 않은 '조용한 혁명'-어떤 교수님이 최근 한국 사회의 변화를 이렇게 말씀하셨더군요- 이 한국 사회에 왜 진행되고 있는지, 한 번쯤 고민해야 하는 것 아닐까요?

타흐리르 광장에 도도히 흐르는 시민혁명의 정신을 보며 희생을 감수하고 분연히 떨치고 나섰던 재야운동 시절의 초심을 이재오 장관이 다시 한 번 곱씹어 보길 기대합니다.형식은 변해도 그 때 그 고민은 21세기 한국 사회에 똑같이 진행 중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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