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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든 국회의원도 몰랐던 '그 법'

내년 총선부터 재외국민들의 해외투표가 시작됩니다. 재외국민은 유학생, 해외주재원 등 일시체류자와 영주권자를 합쳐 모두 24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재외국민 투표권은 재외국민들의 참정권 제한이 위헌이라는 판결에 따라 지난 2009년 2월 국회를 통과한 선거법 개정안에 의해 효력이 발생했습니다. 따라서 재외국민들에게 최대한 국내에 있는 국민들과 같은 권리의 참정권을 주는 것이 원칙적으로는 맞습니다.

하지만 한국 정치의 현실을 보면 돈으로. 밥으로 표를 사는 행위가 아직 근절됐다고 보기 힘든 마당에 해외에서는 선거법 위반 행위를 제대로 잡아낼 수 없다는 우려 때문에 영주권자에게만, 대통령 선거와 비례대표 국회의원 선거권을 주기로 여야가 합의했습니다. 그래야 선거운동이 과열돼 불법선거가 난무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법안이 본회의를 통과하고 2년 가까이 지난 시점에서 재외국민 선거를 안내하는 중앙선관위의 안내문에는 생소한 문구가 들어있었습니다. 영주권자 가운데 이른바 '국내거소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유학생 같은 일시체류자와 똑같이 지역구 의원 투표권도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는 사실 기자인 저만 모르고 있었던 것인가 하고, 여기저기 지난 기사도 찾아보고, 당시 정치개혁특위에서 선거법 개정을 맡았던 의원들에게 전화로도 물어 봤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같이 제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영주권자 중에서도 거소증이 있으면 지역구 투표 하지 않느냐?"
"무슨 소리냐? 일시체류자 말하는 거냐?"
"일시 체류자 말고, 영주권자 중에 국내에서 계좌거래 같은 경제활동 위해서 편의상 거소신고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 사람들도 지역구 투표 하나?"
"영주권자는 비례만 하는데?"

중앙선관위는 국회에서 만든 법에 따라 재외선거제도를 확정한 것일 뿐이라며 2009년 2월에 개정된 선거법 '218조의 4'를 보여 줬습니다. 이 조항은 국외 부재자 신고 대상을 규정하고 있는데 "주민등록을 가지고 있거나 국내거소 신고를 한 사람으로서 국외에서 투표를 하고자 하는 사람은 매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가 있을 때마다 국외부재자 신고를 하여야 한다."라고 돼 있습니다.

중앙선관위의 재외국민선거 담당 국장은  영주권자들이 국내에서 주민등록증을 대신해서 거소신고를 한 것이기 때문에 주민등록증이 있는 사람과 거소증이 있는 사람을 같이 봐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재외국민은 궁극적으로 모든 선거권을 갖는 것이 헌재의 판결 취지에도 맞기 때문에 문제가 없는 입법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선관위의 설명처럼 취지에는 문제가 없다고 해도 문제는 이 법을 직접 만든 국회의원들은 이 조항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점입니다. 2009년 당시 이 법을 논의한 상임위인 국회정개특위의 전체회의록과 법안소위 회의록을 읽어 보니, 당시에도 이 조항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조항은 어떻게 탄생한 것일까요?

국회 상임위 마다 법안심사 소위가 있습니다. 중요한 소위이기 때문에 여야 입장을 대변하는 간사들이 대부분 이 법안소위에 들어갑니다. 법안소위 위원장은 여당의 간사가 맡습니다. 당시에는 정개특위 한나라당 간사였던 권경석 의원이 소위원장이었고 민주당 간사였던 강기정 의원이 법안소위 위원이었습니다. 이들을 주축으로 6명 정도의 소수가 법안소위에 들어가 법안 심사를 중점적으로 논의합니다. 그러나 법안 문구를 놓고 논의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쟁점들을 표로 정리한 것을 놓고 함께 실랑이를 벌입니다.

그리고 그걸 요약, 정리해서 결정하고 상임위 전체회의에 보고합니다. 그러면 법안소위에 들어가지 않았던 의원들까지 포함해서 그 요약 정리된 것만 듣고 찬반 토론을 벌인 뒤 의결합니다. 이렇게 의결이 끝난 뒤에 상임위원장은 "그럼 조문 정리 등에 대해서는 전문위원과 여야 간사에게 맡기기로 의결하자"고 합니다.

이렇게 상임위 통과가 끝난 다음에 실질적인 조문 작성이 시작됩니다. 이때, 맡기로 한 여야 간사들은 사실 제대로 참여하지 않습니다. 국회 분야별 전문위원과 해당 정부기관 공무원들이 머리를 맡대고 조문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본회의로 넘어가고, 본회의장에 모인 의원들은 또 법안에 대한 간략한 요약 설명만 들은 뒤 찬반 투표를 합니다. 이러다보니, 국회의원도 모르는 법조항이 버젓이 들어있기도 한 것입니다.

보도가 나간 뒤 민주당은 여야 합의를 깨고 한나라당이 끼워넣기한 법이라고 반발했지만, 사실은 한나라당조차 당시에는 그런 법 조항이 있는지 잘 몰랐습니다. 영주권자 120만 명 가운데 6만5천 명 정도가 우리나라에 거소신고를 해 뒀습니다. 그런데 6만5천에 그치지 않고 전체 영주권자로 확대될 소지도 있습니다. 현재 행안위에 계류중인 정부 발의 주민등록법 개정안 때문입니다.

이 개정안에는 국외이주신고를 하는 사람에 대해 종전에는 주민등록을 말소했지만 앞으로는 주민등록을 말소하지 않고 행정상 관리 주소를 두고 주민등록번호를 살려준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국내거소 신고가 필요 없게 됩니다. 앞서 문제가된 공직자 선거법 218조와 이 주민등록법 개정안이 맞물리면 영주권자 모두에게 거소증과 마찬가지인 지역구가 배정될 수 있기 때문에 영주권자 모두 지역구 투표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이미 지난 연말 한나라당과 중앙선관위는 이같은 유권해석을 내려 놓은 상태였습니다.그리고 주민등록법 개정안을 2월 임시국회 최시급처리 법안 14개 가운데 하나로 올려 두었습니다. 그러나 보도가 나가고 난 뒤, 한나라당은 주민등록법이 개정되면 영주권자로 지역구 투표가 전면실시 될 수 있어, 보완하기로 지난 1월 선관위와 행안위가 합의했고 한나라당도 이에 동의했다고 발표했습니다.

기자가 취재를 시작한 시점이 1월 중순입니다. 당시만해도 한나라당은 영주권자 지역구 국회의원 투표 전면 실시 가능성에 대해  일부 고위 당직자들은 알고 있었지만 문제 삼지 않으려 하는 분위기였고, 중앙선관위도 영주권자 지역구 투표 전면 확대에 대해 어떤 대책을 논의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취재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물론, 문제라고 인식한 시점이 언제이든 간에 '어물쩍' 주민등록법안이 통과되지는 않게 되었으니 다행입니다.

국회는 입법기관입니다. 법으로 나라 정책의 메뉴얼을 만들어 주는 곳입니다. 그런데 국회에서 취재하다 보면, 황당하다 싶을 정도로 '어물쩍' 이뤄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한나라당이 지난 연말 새해예산안을 통과시키면서 정작 한나라당에 필요한 예산들도 줄줄이 빼먹은 것이 한 예입니다. 회의장에서 국민의 대표로 찬성, 반대 투표를 할 때 내용도 모르면서 당론에 따라, 계파 입장에 따라  줄줄이 투표하지 말고, 그리고 "그 많은 법안을 언제 다 보겠나?"하는 자기 합리화에 숨지 말고, 한 명 한명의 국회의원들이 엄중한 책임감을 갖고 일해 주시길 바라고 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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